영화 <안시성>

4년 전 여름 <명량>, 작년 이맘때 <남한산성>, 그리고 올해 <안시성>. 영국 역사가 E. H. 카에 따르면, 역사는 과거에 대한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주관적 텍스트입니다. 즉, 역사는 그저 과거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한다는 거죠.
<명량>은 한반도 역사상 최고 스타라고 할 수 있는 이순신을 내세워, 무능력하고 타락했던 당시 지도자 이미지를 대체하는 이상적인 리더상을 보여줍니다. 더하여서 ‘세월호’ 비극으로 인해 국가 전체가 무기력증에 빠졌을 때, 과거엔 우리에게도 이런 지도자가 있었고, 이런 기적이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비극의 진도 앞바다를 기적의 바다로 바꿔놓았죠.
반면 ‘삼전도의 굴욕’을 다룬 <남한산성>은 우리의 무기력함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에요. 대의명분을 내세운 척화파와 실리적 노선을 견지한 주화파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우리네 과거 모습이 세계 초강대국 미·중·일·러 사이에 끼어 복잡하게 꼬여있는 오늘의 현실과 자연스레 겹쳐집니다.
그래서 <명량>이 관점에 따라 “우리가 해냈으니, 너희도 할 수 있다”라는 격려, 혹은 “우린 할 수 있었는데, 너흰 왜 못했냐”라는 훈계로 읽힌다면, <남한산성>은 “우리가 이렇게 실패했으니, 너희는 그러지 마라”라는 조언으로 들립니다.

영화 <안시성>은 645년 당태종이 이끄는 20만 대군의 파상공세에 3개월여 맞서, 기적적인 승리를 이끌어냈던 안시성 고구려인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과 그에게 협조적이지 않았던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의 갈등이 조금 그려지긴 하지만, 영화는 당나라 군대에 맞서 싸우는 안시성 이야기에 거의 대부분을 할애합니다. 그래서 ‘기승전결’로 치밀하게 짜인 복잡한 서사를 보여주고 있진 않습니다. 목숨 걸고 절박하게 싸웠던 당시 안시성 상황을 대변하듯 매 순간이 클라이맥스라, 마치 ‘기결결결’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결국 승리를 쟁취해냈다는 속칭 ‘국뽕’(국가와 마약을 조합한 신조어로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우는 걸 일컬음) 영화의 외양을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 ‘양만춘’의 이름이 등장한 건, 안시성 전투가 있은 지 거의 1000년이나 지나서입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비롯해 중국의 역사서에도 ‘양만춘’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저 안시성주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지요. 그런데 조선 중후기 문인들인 윤근수·송준길·박지원 등이 느닷없이 ‘양만춘’이라는 이름을 거론하며 안시성 전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이와 같은 국란을 앞서 극복했던 영웅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고, 그 대상이 바로 안시성주였던 거예요.

이순신을 내세워 그의 내면과 갈등에 초점을 맞춘
<명량>과 달리, 영화 <안시성>은 안시성주와 함께 전투에 참여한 안시성 사람들 사이의 신뢰 관계에 좀 더 관심을 보입니다. 현대전처럼 무기와 무기가 싸우는 게 아닌 사람 대 사람이 직접 맞부딪히는 고대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동료에 대한 신뢰’입니다. 한 사람의 영웅적 결단이나 능력보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승리를 이끌어내는 가장 실질적 요인이지요.

<남한산성>이 우리에게 앞으로 뭘 해야 할 것인지를 시사했다면, 올해의 <안시성>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안시성주와 연개소문이 그렇고, 안시성주를 지키려는 안시성 주민과 암살하려는 외부인이 그렇고, 맨날 티격태격하는 부하 ‘풍’과 ‘활보’가 그렇듯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에 대해 영화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족·공동체·국가·국제사회 질서 모두, ‘약속’을 기반으로 이뤄졌습니다. 다름 가운데 조화, 그걸 지탱하는 신뢰와 믿음이 요즘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게 느껴지는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임택
단국대학교 초빙교수. 미국 오하이오대학교에서 영화이론을 수학하고, 대학에서 영화학과 미학을 강의하며, 철학과 인문학을 통해 영화를 독해하고, 시대와 소통하는 방법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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