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였을까. 가을이 오면 축제의 밤을 만들고 싶었다. 산세 깊은 곳이거나,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해변이거나, 강과 나무가 만나는 섬이어도 좋겠지. 그런 공간의 추억들이 가을바람에 나부끼며 내 인생의 한때를 노래할 수 있다면, 그땐 젊은 날의 실패까지 위로해준 아바의 노래 ‘I Have a Dream’을 들어도 좋을 거야.
하지만 내겐 여전히 꿈이 있고, 노래가 있어.
그것만으로도 어떤 시간이든 헤쳐 나갈 수 있겠지.
음악, 로맨스, 가족, 우정, 그리고 낯설고도 아름다운 풍경들과 만나는 여행…. 인생이란 어쩌면 이런 요소들로써 씨줄과 날줄을 삼아 엮어가는 여정이 아닐까.
낯설어도 착하게 늙어가는 사람들 몇몇과, 아직 다 풀어놓지 않은 추억을 공유한 친구들, 그들 몇이라도 초대할 거야. 그들과 깔깔 웃으며 때론 눈망울 가득 고인 눈물을 찾겠지. 그러면 잔을 들어 그들의 노래와 건배할 수도 있겠지. 가을 그 축제의 밤이라면….
그래, 인생의 빛나는 정상은 어쩌면 그 어디쯤에 있을지 몰라. 무슨 엄청난 공을 세우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렁주렁 훈장을 받을 때이거나, 야망에 취해 헉헉대며 내달려온 경주의 끝도 아닌, 그 모든 열기와 흥분과 긴장과 환호들이 사라진 뒤의 해질녘, 아리랑 가락이 들리고 젊은 날을 물들이던 이별의 모든 시간들이 별처럼 떠오르는 밤, 그 은하수 어디쯤에서 나는 인생의 절정에 도달할 거야.
그 축제의 시간, 내 안에 무엇이든 용서할 수 있는 너그러운 강물 한 줄기 생겨난다면, 아니 용서란 건 사람들의 언어가 아닐 테니 차라리 깡그리 망각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가장 순수했던 시간으로 돌아가 맨 처음의 설렘처럼 잔을 들어 노래할 수 있다면, 나의 축제의 밤은 비로소 저물어가겠지.
그러면 떠나보낸 이들을 그리워하며 사진 한 장을 골라 도톰한 액자에 담아 선반 한쪽에 잘 올려둘 거야. 그들과 지낸 한 토막 같은 시간들을 망각의 상자로부터 꺼내는 일이야말로 내 인생에 대한 예의일 테니까.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들을 찾아내어 후후 먼지를 불어낸 뒤 부끄러운 민낯을 보며 웃어야지.
세상에 마땅한 일이란 게 없거늘 그리 착각하며 감사하지 못한 누군가의 친절을 새삼 꺼내어 뒤늦은 감사의 인사를 해야지. 가까이 늘 그 자리에 있다는 일상에 나는 또 얼마나 무례했을까. 마음을 담아 그때그때 선물 하나라도 했어야 했는데 요런조런 핑계로 세월만 보낸 거야. 뭉개어 온 게지. 누군가 한 말처럼 알고 지은 죄 백 가지, 모르고 지은 죄 천 가지라고. 참 기가 찰 노릇인 걸.
야망 열기 흥분 냉정 배신 증오…. 그런 모든 시간들로부터 떠나 내 인생의 축제가 열리는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다.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박명철 기자
자서전 집필 강사로 활동하고 있고, 아름다운동행 자서전 쓰기학교의 주강사이기도 하다.
박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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