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은 얼마나 무더웠던지 아직 가을의 기운이 낯설다. 그 뜨거운 날에도 가족이 함께 피서지에서 행복한 한때를 보내거나, 누군가는 푸른 청춘의 시간을 살고, 설레는 사랑을 하였으리라. 그리고 모든 추억들을 뒤로한 채 우리의 시간은 또 흘러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먼 바다에 스며들겠지. 눈물겨운 이별도 여름날의 더위처럼 낯설어지겠지. 문득 돌아본 그 시간들은 창고에 쌓인 책처럼 켜켜이 쌓일 거야. 오후의 햇살이 들어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고, 나른한 세월의 한구석으로 모든 열기는 사라지겠지.

그래서였을까. 가을이 오면 축제의 밤을 만들고 싶었다. 산세 깊은 곳이거나,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해변이거나, 강과 나무가 만나는 섬이어도 좋겠지. 그런 공간의 추억들이 가을바람에 나부끼며 내 인생의 한때를 노래할 수 있다면, 그땐 젊은 날의 실패까지 위로해준 아바의 노래 ‘I Have a Dream’을 들어도 좋을 거야.

하지만 내겐 여전히 꿈이 있고, 노래가 있어.
그것만으로도 어떤 시간이든 헤쳐 나갈 수 있겠지.


음악, 로맨스, 가족, 우정, 그리고 낯설고도 아름다운 풍경들과 만나는 여행…. 인생이란 어쩌면 이런 요소들로써 씨줄과 날줄을 삼아 엮어가는 여정이 아닐까.
낯설어도 착하게 늙어가는 사람들 몇몇과, 아직 다 풀어놓지 않은 추억을 공유한 친구들, 그들 몇이라도 초대할 거야. 그들과 깔깔 웃으며 때론 눈망울 가득 고인 눈물을 찾겠지. 그러면 잔을 들어 그들의 노래와 건배할 수도 있겠지. 가을 그 축제의 밤이라면….
그래, 인생의 빛나는 정상은 어쩌면 그 어디쯤에 있을지 몰라. 무슨 엄청난 공을 세우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렁주렁 훈장을 받을 때이거나, 야망에 취해 헉헉대며 내달려온 경주의 끝도 아닌, 그 모든 열기와 흥분과 긴장과 환호들이 사라진 뒤의 해질녘, 아리랑 가락이 들리고 젊은 날을 물들이던 이별의 모든 시간들이 별처럼 떠오르는 밤, 그 은하수 어디쯤에서 나는 인생의 절정에 도달할 거야.
그 축제의 시간, 내 안에 무엇이든 용서할 수 있는 너그러운 강물 한 줄기 생겨난다면, 아니 용서란 건 사람들의 언어가 아닐 테니 차라리 깡그리 망각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가장 순수했던 시간으로 돌아가 맨 처음의 설렘처럼 잔을 들어 노래할 수 있다면, 나의 축제의 밤은 비로소 저물어가겠지.
그러면 떠나보낸 이들을 그리워하며 사진 한 장을 골라 도톰한 액자에 담아 선반 한쪽에 잘 올려둘 거야. 그들과 지낸 한 토막 같은 시간들을 망각의 상자로부터 꺼내는 일이야말로 내 인생에 대한 예의일 테니까.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들을 찾아내어 후후 먼지를 불어낸 뒤 부끄러운 민낯을 보며 웃어야지.
세상에 마땅한 일이란 게 없거늘 그리 착각하며 감사하지 못한 누군가의 친절을 새삼 꺼내어 뒤늦은 감사의 인사를 해야지. 가까이 늘 그 자리에 있다는 일상에 나는 또 얼마나 무례했을까. 마음을 담아 그때그때 선물 하나라도 했어야 했는데 요런조런 핑계로 세월만 보낸 거야. 뭉개어 온 게지. 누군가 한 말처럼 알고 지은 죄 백 가지, 모르고 지은 죄 천 가지라고. 참 기가 찰 노릇인 걸.
야망 열기 흥분 냉정 배신 증오…. 그런 모든 시간들로부터 떠나 내 인생의 축제가 열리는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다.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박명철 기자
자서전 집필 강사로 활동하고 있고, 아름다운동행 자서전 쓰기학교의 주강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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