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종교개혁 501주년을 맞으며

동유럽에 관광객들이 모이며 새로운 여행의 허브가 된 프라하. 도나우 강, 다뉴브 강의 체코 이름인 불타바 강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체코’를 떠올리게 하며 카렐교 아래를 유유히 흐른다. 밤낮없이 사람들로 붐비는 카렐교를 지나 구시가지 광장으로 들어서면 광장 중앙에 거대한 얀 후스(Jan Hus)와 그의 제자들, 희망을 상징하는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가 조각된 동상 앞에 많은 사람들이 기념사진 찍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이 모두 기독교인들인가?”
혼잣말을 하며 바라보는데 그곳에서 여러 해 살아온 김민석 씨가 다가와 설명해 주었다.
“체코인, 특히 프라하 사람들에게 있어서 얀 후스는 종교 개혁자로서 뿐 아니라 자국어를 찾아주고 정의와 사랑을 일깨워준 분으로 체코인 모두가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우리나라 세종대왕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작년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에 루터를 공부하다 루터보다 백년 앞서 교황청의 부패를 지적하며 성경의 가르침을 설파한 사람, 안타깝게도 화형당한 인물 정도로 알게 된 얀 후스, 그의 동상이 프라하 광장 중앙에 있는 것이 적이 궁금했었는데 그 이유를 찾은 것이었다.

탁월한 지성인 얀 후스
시골에서 태어나 가난한 가운데 홀어머니 슬하에 자란 얀 후스는 뛰어난 총명함으로 그 지역 최고의 명문 카렐 대학교(프라하 대학교라고도 함)에 입학한다. 장학금으로 공부하며 학위를 받은 후 바로 교양학부와 신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사제가 된다. 이후 철학부 학장을 거쳐 대학교 총장이 되고 프라하의 성 미카엘 교회에서 왕실 귀족들의 미사도 집례해 당시 최고의 지식인, 종교인으로 서게 된다.
그 가운데 1402년, 보헤미아 민중들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로 마음먹고 베들레헴 채플에서도 설교하게 된다. 10여 년 간 ‘신앙은 실행에 옮기며 사는 것’이라 강조한 후스는 라틴어를 모르는 일반인들을 위해 체코어로 성경을 번역해 모두가 직접 읽고 볼 수 있게 했다. 또 체코어 철자법도 개량, 개혁해 지금의 체코어 기반을 세웠으며 찬송가도 보급해 대중 모두가 예배에 함께 참여케 했다. 이것은 당시 힘 있는 위치에서 민중을 사랑한 얀 후스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가톨릭 지도자들이 성역으로 내세웠던 성만찬에 일반인 모두를 참여케 하여 그리스도의 뜻을 새기게 했고, 교황청의 부패를 공개 비판하는 등 공의를 앞세워갔다. 후스의 이러한 개혁의 의지는 일부 귀족과 도시 민중들로 하여금 그의 지지자가 되도록 이끌었고 교황청에서는 걸림돌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토록 사랑받던 지식인이자 종교인을 교황청은 어떻게 화형까지 시킬 수 있었을까.

콘스탄츠 공의회
로마 가톨릭 지도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비판이 들려오자 교황청으로 하여금 얀 후스를 독일의 콘스탄츠 공의회에 불러들이게 한다. 얀 후스는 ‘진리를 세우기 위해 증인대에 설 준비가 되어 있다’며 자신의 의견을 펼칠 기회라 여기고 회의에 참석하는데, 고향과 멀리 떨어진 그곳에서 그는 바로 체포되고 감금돼 있다가 1415년 4월, 공개재판 후 화형당하고 만다.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작은 양심의 기대가 무너진 시간이었다.
갇혀 있는 동안 그는 “나의 민족이여 부디 살아남으십시오. 주님의 나라가 올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사람들 앞에서 진실을 부정하지 마십시오”라는 말들을 남기며 순수한 믿음을 당부했다. 그의 사후 ‘후스파’라 불리는 이들이 생겨 이러한 사상들을 이어가며 보헤미안 공동체를 만들어 후에 모라비안 교회와 체코 개신교로 발전시켜갔고, 체코인들은 정의로운 지도자 얀 후스를 기억하며 광장 한복판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프라하 베들레헴 채플
베들레헴 채플은 건립자의 뜻에 따라 체코어로만 설교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3천 명이나 모일 수 있는 장소였던 이 베들레헴 채플에서는 카렐대학 내에서만 논의될 수 있던 새로운 사상들이 일반인들에게 전해질 수 있었는데, 그것은 진리 안에서 자유를 가진 용기 있는 개혁자 얀 후스가 여기서 설교를 하면서 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채플은 실내가 매우 단순하게 되어있어(우리의 개척 예배당을 떠오르게 한다) 흔히 생각하는 성당과 대조적이어서 놀라게 되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설교단 앞 구역을 방해하지 않도록 한 것이라 한다.
얀 후스는 여기서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성서가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이라는 것, 성직자는 경건한 삶을 살아 거룩함을 지켜야 한다고 체코어로 주장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후스파”
얀 후스는 자신보다 40여 년 앞서 교황권의 합법성에 의문을 제기했던 옥스퍼드의 존 위클리프의 논문을 보며 로마 가톨릭의 세속화에 대해 비판하게 된다. 또한 위클리프가 성서를 자국어인 영어로 번역한 것처럼 자신도 체코어로 번역해 모든 사람이 읽게 했는데, 이 일로 교황청의 파문을 당하게 되고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 100년 후, 마르틴 루터는 얀 후스의 저술을 읽은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알든 모르든 우리는 모두 후스파다.”

그리고는 생각이 났다. 이 땅의 백정과 하녀들이 초창기 교인의 대부분이었다는 승동교회와 연동교회에서 그들에게 맞춰 한글로 가르치셨을 목사님들. 그 교회들 뿐 아니라 갖바치, 소실, 기생들, 몸종들이 복음을 먼저 받아 교회의 근간을 이룬 한국교회의 초기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지는 듯했다.

전영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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