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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게’ 자족의 마음이 필요한 시간
특집-자족,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224호] 2018년 09월 01일 (토) 김겸섭 @
   
북유럽 스웨덴과 덴마크 사람들의 삶의 정서를 설명해주는 최적의 단어는 ‘휘게(Hygge)’입니다. ‘휘게’란 ‘편안하게 그리고 함께 따뜻하게’라는 친밀감을 뜻하는 어휘입니다.
곧 스웨덴이나 덴마크 사람들은 하루 일과를 마친 후 저녁이 되면 자기 집에서 촛불을 켜놓고 소수의 친한 벗들과 따스한 음식을 나누며 소소한 담소를 즐기는 공간과 시간을 갖는데, 그들은 이것을 ‘휘게’라고 말합니다. 사람을 ‘안아주다’의 ‘허그(Hug)’도 ‘휘게’에서 나온 말임을 볼 때 ‘휘게’만큼 삶을 포근하게 채색하는 어휘는 없을 것입니다.

행복, 황금과 권력에서 찾지 않아야
그들은 ‘황금의 중량’과 ‘권력의 규모’에서 행복을 찾지 않습니다. 황금과 권력의 수명이 의외로 짧다는 것을 이미 간파했을 뿐 아니라 황금과 권력으로만 조성한 행복은 ‘숲’이 아니라 ‘늪’이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행복의 발원(發源)이 죽음 같은 전투를 통해 획득하는 전리품이 아니라 삶의 일상에서 소소한 감사를 발견하고 그것을 나누며 즐기는 것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누락된 행복은 곧 사라질 환시(幻視)인 것을 알았던 그들이 유독 멋있습니다.
덴마크 사람들이 첫 월급을 타면 귀금속이 아닌 ‘의자’를 사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에서 “갖고 싶은 것이 적은 사람일수록 가장 많이 갖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이미 이해했던 것입니다. 일 년의 절반이 겨울이며 섬나라임에도 수질이 나빠 식수가 귀한 곳임에도 그들의 행복감성수치가 높은 것은 그들 곁에 ‘휘게’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자존감은 견실하고 튼실합니다. 그들이 바닷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 세운 제방만큼 말입니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에세이 <랑겔한스섬의 오후>(1986)에서 참 행복이란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속옷을 볼 때 느끼는 작은 즐거움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들려줍니다. 이 작가 또한 삶의 소소한 기쁨인 ‘휘게’에서 행복의 수원(水源)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욕망은 작게, 감사는 크게
사실 이 ‘휘게의 삶’은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자들이 ‘참 행복의 요소’로 꼽았던 “욕망은 작게, 감사는 크게”라는 정신을 의미하는 ‘아우타르케이아’와 맞닿아 있습니다. 흔히 ‘자족(自足)’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아우타르케이아()’는 ‘아우토스(, 스스로)’와 ‘아르케오(, 만족하다)’의 합성어로서 ‘자신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감사로 받아들이고 그 현실에 만족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놀랍게도 이 ‘자족’이란 어휘가 사도바울의 서신에서도 발견됩니다. 기독교의 세계화를 위해 34년간 자신의 삶을 기쁘게 소진(消盡)했던 사도 바울은 자신을 반대하는 무리들에 의해 법정에 소환되고, 이후 유죄판결을 받아 지하감옥에 수감됩니다. 그런 바울을 소중히 여겼던 빌립보교우들은 마음이 담긴 물질로 옥중 바울을 섬깁니다. 이에 감사했던 바울은 자신의 후원자였던 빌립보 성도들에게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빌립보서 4:11)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어둡고 습기 많은 지하감옥에서의 수감생활, 따라서 기뻐할 일도, 감사할 일도 없는 그 암울한 여건 속에 갇혀 있음에도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자족(自足)’을 소유함으로서 그 내면은 날마다 새로울 수 있었던 겁니다.

요셉의 ‘자족의 삶’
바울이 소유한 ‘자족의 삶’은 어쩌면 구약의 사람 ‘요셉’에게서 배웠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요셉의 삶은 ‘3번에 걸친 배반당함’을 통해 가슴에 큰 상처가 있던 삶이었습니다. 곧 아버지 야곱의 편애로 인해 이복형들에게 시기와 미움을 동시에 받아 어린 17살에 그 형들에 의해 미디안 상인에게 은(銀) 20에 팔립니다. 이후 이집트 권력자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들어가 특유의 성실함을 인정받아 총무로 승격되었을 때 이런 요셉을 연모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한 이유로 모함을 받아 투옥된 일, 그 옥중에서 파면당한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독하여 그의 복직을 알려주었으나 이후 2년간 그 관원에게 철저히 잊히는 아픔 등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아름다웠던 것은 이후 파라오의 총애를 받아 이집트의 두 번째 권력자가 되었음에도 자신에게 해악을 입힌 형들, 보디발의 아내, 술 맡은 관원에 대한 그 어떤 보복이나 복수도 시도하지 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요셉은 3번에 걸친 극한 고통 속에도 과격한 원망과 분노로 자신의 생을 학대하지 않고, 오히려 그 겨울 냉골같이 차갑던 시간조차도 그것이 자신에게 꼭 필요해서 하늘이 허락한 ‘보석 같은 시간’으로 받아들이며 스스로 만족하는 ‘자족의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모든 사람이 하수구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만 그 가운데 몇몇은 하늘의 별을 올려다본다”라고 말합니다. 자족의 삶, 그것은 깊고 더러운 하수구 속에 빠졌을 때에도 고개를 들고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삶일 것입니다. 요셉처럼 말입니다.

알맞게와 필요한 만큼의 조화 필요
삶이란 무엇이 부족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몰라서 불행한 것입니다. 사실을 말하면 ‘가난은 소수(小數)만 죽게 하지만 탐욕은 모두를 죽게’ 합니다. 무거우면 작은 눈(雪)에도 무너지고, 가벼우면 작은 바람에도 흩어져 버립니다. 삶도 그러합니다. 삶이 탐욕으로 지나치게 무거워지면 붕괴되고 또한 비관과 우울로 인해 소망이 휘발된 가벼운 삶은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파산됩니다. 따라서 삶은 ‘알맞게’라는 균형과 ‘필요한 만큼’이라는 조화가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는 ‘알맞게’보다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해괴한 자본논리를 진리로 추앙합니다. 그 결과 행복의 출처를 소유의 넘침과 지위의 위세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그 행복을 탈취하기 위해서라면 진실과 진리까지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위험 수위까지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행복’이 우상이 되어버린 이 시대를 향해 황금으로만 축조한 행복의 허점을 알고 있었던 고대 그리스 작가 에우리피데스는 희곡 <헤카베>에서 “행복을 너무 믿지 마세요. 행복이 그대에게 다가올 불행까지 막아주지는 못하니까요”라는 날카로운 말을 들려줍니다. 이 말을 기억할 때마다 문득 작가 조지 엘리엇의 소설 <사일러스 마너>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이 작품 속의 아마포 직공인 사일러스 마너라는 남자는 눈부신 금속, 곧 ‘황금’에게 자신의 미래를 맡겼던 사람입니다.
휴일도 반납한 채 행복을 자기 곁으로 호출(呼出)해줄 황금을 검은 가죽자루에 담으며 미소 짓는 마너, 그러나 황금을 지키기 위해 15년간 이웃과 담을 쌓고 살던 어느 날 그의 집에 도둑이 들어 애써 모은 황금이 사라지자 그의 삶은 포말(泡沫)되어 흩어지듯 무너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음을 살던 그의 눈에 열린 문 사이로 황금이 포착됩니다. 벅찬 감격에 달려가 보니 그것은 황금이 아니고 버려진 여자아기의 금발머릿결이었습니다.

마너는 이 두 살배기 아기에게 ‘에피’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돌봐줍니다. 애교와 사랑을 머금고 커가는 에피를 보며 마너는 황금이 주는 것과 전혀 다른 깊은 기쁨을 갖게 됩니다. 이제 황금을 지키기 위해 굳게 닫을 필요가 없어진 마너의 대문과 창문이 15년 만에 열리자, 이제껏 듣지 못했던 새들의 노래가 들렸고 그동안 맡지 못했던 꽃들의 향이 후각을 달콤하게 자극합니다. 순간 마너는 황금을 지키기 위해 닫아버린 문들이 사실은 자신을 감금하고 있었던 ‘감옥 문’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뒤늦게 황금을 훔쳐갔던 도둑이 죽고 황금을 되찾게 되지만, 마너는 더 이상 그 황금을 ‘행복’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이미 마너 곁에 에피와 새들의 노래, 꽃의 향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휘게’가 만든 15년만의 기적이었습니다.

사실 경쟁과 질주라는 두 단어가 지배한 이 시대에 ‘휘게’라는 삶의 방식이 낯설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녹색 잎 새의 푸르름’을 참 많이 닮은 어휘 ‘휘게’는 인간이 신(神)처럼 숭배하는 ‘탐욕’이 아직 발 들여 놓지 못한 ‘행복의 원시림’인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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