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자족,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자족’이라는 주제를 처음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은 이반 일리치(Ivan Illich)였다. 현대 문명에 근본적 비판을 가했던 사상가로 평가받는 일리치는 그의 저서 <그림자 노동>을 통해 자급자족의 삶을 말했고, <학교 없는 사회>를 통해 교육을 제도화한 학교 사회에 근본적 물음을 제기했다.

일리치 관련 책을 낸 박홍규 교수는 <학교 없는 사회>에 대해 “일리치는 ‘스스로 배우는 고유한 능력을 키워주는 상호교류의 전달 과정이 학교 교육을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밝혔다.
일리치 사상의 핵심을 ‘현대문명 속 인류는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필요 속에 자족하지 못하고 늘 결핍을 느낀다’라고 정리할 때, 대량 산업사회에서는 학교교육조차 서비스화 되고 이는 ‘배움’이라는 인간의 자율적인 양식조차 ‘필요’로 바꾸어 수동적 인간을 만들어낸다는 의미가 된다.

현대 문명을 날카롭게 해부한 사상가가 고찰한 ‘늘 결핍 상태에 머무는 인간’이라는 주제는 그 외에도 다양한 영역에서 변주되었다. 특히 책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느린걸음, 2014)는 인간을 시장 상품 존재로 전락시키는 산업 생산 양식을 담백한 문장으로 고찰했다. 소비하는 방식 외의 삶의 대안을 알지 못하는 우리네 삶에 절제하고 자족하는 삶을 들여오려 할 때, 이 책의 몇 문장은 도움이 될 것이다.

“‘현대화된 가난’은 과도한 시장 의존이 어느 한계점을 지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가난은 산업 생산성이 가져다준 풍요에 기대어 살면서 삶의 능력이 잘려나간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풍요 속의 절망이다. 이 가난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창조적으로 살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데 필요한 자유와 능력을 빼앗긴다. 그리고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 평생을 생존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게 된다.”
“세계 어디서나 사람들은 똑같은 공장과 기계, 병원과 방송국, 정책기관에서 흘러나오는 상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낯선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이 의존성을 채우기 위해 똑같은 것들이 더 많이 생산된다. 즉 상품은 표준화되고 가공되며, 미래의 소비자가 그 물건을 받는 대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으로 느끼도록 전문가들이 훈련시킬 수 있게 디자인된다.”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첫 번째 환상은 인간은 소비자로 태어났고, 어떤 목표를 세우든 상품과 재화를 구매해야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문명은 과도한 시장 의존 사회를 만들어 상품 의존성 인간을 양산하고, 대량생산되는 물건의 홍수 속에 우리는 ‘필요’를 느끼는 존재가 되어 주체성을 잃고 그 올가미에 걸려든다.

“우리 사회의 대안은 평범한 사람들이 전문가가 끼워 넣는 필요에 부딪힐 때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부정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전문가가 공인해주는 필요와 결핍, 가난의 반대는 현대의 자급자립이다.…나는 정치적 행동으로 일구어낸 ‘함께하는 절제’로 공생의 도구를 공평하고 자유롭게 사용할 때, 현대화된 가난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행동해 자기 필요를 만족시키는 절제의 윤리, 그 과정에서 흘러나오는 자유와 기쁨, 필요에서 벗어나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부정하는 능력. 일리치가 건네는 몇 가지 대안을 간략히 정리해보았다. 우리 삶에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문화에서 한 걸음 물러나 주체적인 자족의 삶을 꾸리기 위해 이반 일리치를 더 자세히 읽기를 권한다.

박혜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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