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쓰는 교회이야기 1-과림리교회

# 마을의 큰일은 교회와 상의
경기도 시흥시 과림동은 목감천을 경계로 광명시와 접하는 곳이다. 인구 이동이 적어 원주민이 많은 편이었으나 개발 바람이 불면서 최근 10년 사이에 절반 이상이 마을을 떠났다.
올해로 48년째 과림리교회(조석환 목사)는 이곳에서 주민들과 더불어 ‘나쁜 소문’ 없이 꾸준히 한 자리를 지켜 왔다. 그런 오래된 세월의 ‘동거’로 교회는 마을의 일부가 되고 아예 마을 속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마을에는 송씨 집성촌이 있어서 때마다 시제(時祭) 곧 사당에 모여 제사를 지낸다. 오랜 유교의 전통인 셈인데 언젠가 부터 이 제사를 과림리교회가 맡아 기독교 의식으로 치르고 있다. 가문의 어른들이 한두 분씩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변화이다.
처음에는 불신자들이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지금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장례 결혼은 물론이고 칠순과 팔순잔치 등 마을 사람들의 애경사 역시 교회가 중심이 되어 치른다. 주민들 중 많은 분들이 교인들이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교회에 부탁하여 큰일을 치르는 게 당연지사가 되었다.
교회당과 학교의 입구가 거의 붙어 있어서 과림리교회는 마치 학교를 가진 교회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학교에서도 마을과 상의할 일은 교회를 찾아와 상의하며, 학생들을 위해 교회도 크고 작은 도움을 준다.
# 느리고 잔잔한 시내처럼
조석환 목사(사진 우)는 30년 가까이 과림리교회에서 목회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젊은 패기로 교회의 성장을 위해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짜서 교우들에게 도전했다. 교우를 볼 때도 성장에 필요하거나, 덜 필요하거나, 불필요한 사람으로 분류하였으며 가족을 볼 때도 목회 성공의 도구인 양 바라보았다. 어느 날 한 교우가 찾아와 교회를 떠나겠다고 하기까지, 그래서 큰 충격에 빠져 그의 목회 초기를 돌아보기까지 그는 맹렬하게 치달렸다.
농촌과 도시가 맞닿아 이도 저도 아닌 과림동에서 과림리교회는 엉덩이에 뿔 난 소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 교회의 본질·정체성 탐험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우리에게 맞는 것,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본질, 정체성…, 그런 것을 탐험하기 시작했어요. 질문을 바꾸었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우리가 누리는 은혜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러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주님이 행하신 은총 위에서 나와 교회와 우리가 처한 환경을 바라보기 시작한 거예요. 비로소 자유함을 얻었어요. 전에는 업적 성취 등으로써 비교했어요. 그런데 존재를 보기 시작한 거죠. 그러니까 관계가 보이고,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사실 자체만으로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비로소 발견한 거예요.”
이를 ‘은혜의 영성’이라고 그는 표현했다. 정죄하고 판단하는 데서 입을 닫는 일이야말로 믿음생활의 기본임을, 배우고 훈련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교회는 정지된 듯 보였다. 마을의 나무나, 낮은 동산이나, 사시사철 피고 지는 풀꽃들처럼 나직하게 흔들리고, 시냇물처럼 잔잔하게 흘러갔다.

# 살며 기록하며 나누며
그러다 교회당 앞에 우뚝 선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드는 가을이 되면 교인들은 한 해 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일어난 이야기들을 글로 써서 제출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 응답받은 기도와 감사의 이야기들이다.
김말순 집사는 어느 해 가을에 ‘영혼의 열매를 천국으로 보내고’라는 글을 써서 냈다.

심복 씨와 저는 10년 전부터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왔지만, 교회 나가자고 하면 이다음에 나간다면서 미루었습니다. 저는 태신자로 마음에 품고 하루 빨리 구원시켜 달라고 주님께 기도만 하고 기다렸습니다. 심복 씨는 오래 전부터 병마에 시달리며 우울증도 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심복 씨가 교회에 같이 가자고 말했고, 저는 너무나 반갑고 기쁜 마음에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이제부터는 믿음 안에서 성경공부도 하고 신앙생활을 재미있게 잘하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방해인지 교회 한 번 나온 뒤 심복 씨는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습니다. 병원으로 찾아온 목사님께 심복 씨는 주님을 영접하겠다고 시인하고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도 했습니다. 며칠 후 퇴원하여 교회를 두 번 나온 뒤 또 병이 악화되어 입원했습니다. 저는 병원으로 집으로 다니며 챙겨준다고 했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점점 복수가 차면서 악화되었습니다.
하루는 심복 씨가 방안에서 답답해하는 것 같아 남편에게 부탁하여 우리 집 앞 공원에 텐트를 쳐달라고 해서 함께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숨을 거두기 전 저는 심복 씨 손을 꼭 잡고 “심복아, 이제 너는 구원받았으니 천국으로 천사처럼 훨훨 날아가거라” 하고 인사했습니다. 가족들은 믿지 않았지만 저는 혼자 찬송가를 불러주었습니다. 편안한 얼굴이었습니다.


과림리교회 교우들은 김 집사의 글을 함께 나누며 한 영혼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을 공유한다. 이처럼 정지한 듯 보이지만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사시사철 생명의 소리들로 충만하다.
조석환 목사는 이처럼 교우들이 살아온 날을 돌아보며 신앙의 삶을 회고하는 일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 성도들의 삶에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누는 일이야말로 신앙공동체의 큰 사명이기 때문이다.
“1년에 두세 번씩만 써도 10년이면 2, 30편이 되잖아요. 나중에 이걸 모아 책으로 엮으면 좋은 신앙 자서전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실제로 글을 엮어서 돌아가신 뒤에 장례식에 온 사람들에게 나눠드렸더니 큰 감동이 있었어요. 특히 자녀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이 일의 가치를 깨달은 조 목사는 교인들에게만 아니라 마을 어르신들에게도 자서전을 만들어드리는 일을 구상하고 있다. 교회의 청년들이나 마을 중고등학생들이 함께 어르신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면, 조 목사가 교정과 교열을 본 뒤 책으로 엮으면 될 것이라고.

박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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