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을 통해서 보는 세상의 모습은, 진실과 거짓이 혼재된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듯한 거짓과 위선과 탐욕의 물결이 우리를 덮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말합니다.
“우리 중에 선량함을 잃지 않은 사람이 있나요?”
수많은 사건들, 폭로, 고소고발, 정쟁 등을 보면서, 일방의 주장이 아닌 진실이 무엇인지를 궁금해 하며 남의 집 불구경하듯 재미있게 보지만, 자기 자신을 진실의 거울에 비춰보기는 소홀히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때로는 진영논리에 빠져 내 편이 아니면 앞뒤 볼 것 없이 틀렸다고 합니다. 반대편이 하는 얘기는 무조건 부인하고 비판하면서 자기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논거를 갖다 댑니다. 진짜와 가짜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 편이냐 아니냐가 더 중요한 듯합니다.
어쩌면 나의 세계, 생각, 경험, 선입견에 사로잡혀 남이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으려는 것이 내 모습일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권세 있는 말씀을 증거 했는데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던 그들이 오늘 우리가 아닐까요?
하다못해 트럼프 미국대통령도 자기의 의견과 다른 보도를 보면 ‘가짜뉴스’라고 말해 버립니다. 이러다보니 수많은 뉴스나 사건들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누가 옳고 그른지, 진실이 무엇인지, 모를 경우가 많습니다.

그가 그런 짓을 했느냐? 그가 그 자리에 있었느냐가 다퉈진다고 가정할 때, 답은 Yes or No, 둘 중 하나입니다. 어떤 일의 진실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 진실이 묻혀버리거나 가짜가 진짜 행세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무엇이 진짜냐, 진실이 무엇이냐를 가릴 때, 통상 증거가 있느냐 없느냐로 판별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거나 경험한 사람의 말이나 증언을 듣기도 하는데, 사람의 기억력에 허점이나 착오가 적잖게 있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밝혀졌습니다. 증거가 분명치 않을 때는 어느 쪽 주장이 더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느냐를 따져봅니다. 그러나 진짜가 사람들의 논리추단력을 벗어난 의외의 것일 때도 있습니다.

비록 잘못을 했더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사죄하고 회개하고 책임지려는 자세를 보이는 사람이라면 진실한 사람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허위에서 넘어졌지만 진실한 사람으로 다시 일어설 용기를 가졌고 또 누구나 완벽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논쟁의 중심에 선 사람 중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자문합니다.
“나는 진실함이 있는가?”
간단하지만 무서운 질문입니다.
“내 삶이 진실함에 기초하고 있나, 아니면 거짓과 위선으로 덧씌워져 있나?”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언제나 올바르게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진실하게, 정직하게 살려고 애쓰고 있나,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살고 있나?
존경받던 인물들이 비리가 폭로되거나 비난 대상이 되는 걸 보면 두려움이 가득 차서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가?”
언젠가부터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성공하고 잘 살아라’는 말은 많이 듣지만, ‘진실하게 살아라. 정직해라’는 말은 별로 듣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정직하게 살면 험난한 세상에서 낙오자가 될지 모른다 싶어서일까요, 아니면 나는 못하면서 남에게 그렇게 말하기가 거북스러워서일까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지만, 마하트마 간디의 연설은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언제나 진실을 말하십시오. 사업을 할 때에도 진실하게 하십시오. 정직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적들보다 더 정직하십시오. 미움은 미움밖에 낳지 못합니다. 백인들이 정의감을 가질 때까지, 그렇게 행동합시다.”

예수님이 제자를 택하실 때 나다나엘을 보고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며 거짓이 조금도 없는,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 앞에 진실하고 사람들에게 진실하고 하는 일에 진실한 삶, 이것이 문자 속에만 갇혀있어서는 부끄러운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듯이 모든 것이 드러날 그 날, 우리의 ‘속’이 어떤지 모습이 드러나겠지요.

속임과 거짓과 금권이 넘실거리는 세상에서 진실하게 살아서 구별되기를 다시 결심하는 가을의 초입입니다. 혼자 힘들면 서로 격려하고 힘을 합치고 또 서로 자랑도 해야지요. 용기를 내야지요. 서로서로 파이팅!

김정삼
법조인으로서 이웃의 아픔에 눈을 두는 그리스도인. 교회와 사회와 국가의 바름과 옳음을 생각하며, 윤리 환경 봉사 관련 NGO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원주제일감리교회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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