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최초의 수용소, 독일 뮌헨

‘일본에 직접 당한 게 없어서 그들의 과거 행실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외국인을 만나면 우리 마음이 어떨까.
유럽을 방문하며 나치의 홀로코스트(집단 학살) 잔재가 여러 곳에 남아 있음을 알게 되며 ‘아우슈비츠’만 알고 있던 얄팍한 지식이 부끄러워졌다. 유태인을 비롯해 집시, 정치범, 동성애자 등을 잡아 필요한 군수 물자를 생산해 내도록 노동을 착취하다 유태인 절멸을 시도한 수용소가 독일을 비롯해 유럽 전역에 60 여개나 된다는 사실.
그 가운데 강제 수용소로 1933년 처음 세워져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던 게오르규 엘저, 히틀러의 인종주의를 비판한 프리츠 게를리히 등 반 나치 인사를 비롯해 유태인 4만 명을 학살하고 20만 명의 삶을 강탈한 독일 다하우 수용소를 방문했다.

‘노동이 자유를 주리라’
뮌헨에서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다하우. 이 작고 평범한 마을에 죽음의 수용소라니. 거기에선 단체 관광객 보다 자녀를 데리고 온 부모들, 삼삼오오 젊은이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SS(나치 친위대로 무장한 수용소 관리)가 거주하던 넓은 마당을 지나 ‘노동이 자유를 주리라’(Arbeit Macht Frei)는 문구가 쓰인 철문을 통과하자 다른 세상이 느껴지며 섬뜩해왔다. 곳곳에 감시탑이 있고 전기철조망이 설치됐었다는 담장 안에는 건조하게 넓은 32동의 막사 자리에 길게 한 동이 남아 있었고, 그 앞에 다하우 수용소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달려 있었다.
애당초 정치범 수용을 목적으로 5천 명을 예상했던 공간에 20만 명이 거쳐간 처참한 환경은, 닭장 같은 막사와 아무때나 즉결 처형했다는 바로 옆 장소를 보며 가히 짐작이 갔다. 거기에 영양실조와 죽음에 다다르는 생체 실험까지.

영화가 현실이 되던 순간
이러한 곳에서도 살아남아 후대에 증인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가 떠올랐다. 1974년도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게오르규는 당시 험난한 시대를 지내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며 자전적 소설인 <25시>의 스토리를 말했었다.
주인공 요한은 조작된 문서로 유태인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다. 아내는 가짜 유태인 남편 때문에 집과 토지를 몰수당할까 이혼 서류에 서명하는데 요한은 우연히 우수한 아리안족 골상으로 지명돼 독일 친위대 모델로 신문에 사진이 실리며 수용소 감시원으로 바뀐다. 그곳을 빠져나온 후 2차 대전을 맞자 나치 당원 경력으로 다시 수감. 이렇게 혼돈된 세상 속 희생된 사람이야기였다. 이 밖에도 ‘더 피아니스트’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등의 영화가 눈 앞에 보이는 곳이었다.

강제 수용소의 날들
수용소 일과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연병장에서 점호하고 한 시간의 연설 시간을 갖는데 이때 쓰러지면 바로 가스실로 끌려갔다고 한다. 조회가 마치면 곧바로 무기 만드는 일을 했는데 감시자의 눈 밖에 나면 수용소에 전시된 그림과 같이 공중에 두 팔이 매달린 채 개가 물어뜯는 장면처럼 겪어야 했고, 테이블에 엎드려 서너 명에게 채찍에 맞았음을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린 그림으로 알 수 있었다.
다하우 수용소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앙상한 뼈들의 연결로 된 것이 더욱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수용소 안에서는 오로지 노동력으로만 등급이 매겨져 병약한 사람은 곧바로 가스실로 보내지던 상황이니 얼마나 온 힘을 다해 하루하루를 지켜냈을까.
조금 떨어진 곳의 화장터 건물은 몇 개의 방으로 구분되어 마지막까지 몸에 지녔던 것들(금니, 안경 등)을 빼내고 효율적으로 죽음의 처리를 하게 되어 있었다. 여기에 이르자 히틀러 한 사람의 잘못된 이념이나 생각으로 이런 집단 처형이 십 수 년 간 이뤄졌다고 볼 수 없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는 그를 옹위하는 나치당이 있었고, 그 당을 지지한 국민 다수가 알게 모르게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다.

히틀러에 대한 기록
그는 어린 시절 작은 그림을 그려 팔며 노숙자 생활을 하다 1차 대전에 참전해 훈장을 받는다. 그러나 독일이 패하는 상황을 보며 편협한 민족주의를 품게 되고, 빗나간 우생학과 인종주의에다가, ‘먹지 않으면 먹힌다’는 잘못된 사회진화론을 자신의 이념화하여 주입하기 시작했다.
또 유럽의 가톨릭 문화권에서 유태인을 배격하던 시대정신을 흡수하여 유태인을 ‘신을 살해한 자들’이라 여겼다고 전해진다(<아돌프 히틀러>존 톨랜드 지음).
심지어 자신을 신의 복수의 손으로서 행동하는 것이라 여겨 양심에 거리낌 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 그러나 자신을 반대한 디트리히 본회퍼를 비롯해 독일 고백교회의 신실한 목사 7백여 명을 수용소로 보내 처형한 것을 보면 그의 종교적 신념은 비논리적이고 혼돈되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유럽을 지배할 야망을 가지고 아리안족의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인종투쟁을 하는 한편, 일본과는 동맹을 맺고 ‘명예 아리아인’으로 선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일본을 창작성이 없는 열등한 인종이라 하기도 하며 손재주와 일처리는 빠른 인종이어서 하인으로 이용하기 좋다고도 했다. 이 와중에 히틀러가 세력을 넓히자 일본에선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란 책이 교과서처럼 읽히기도 했다.

1945년 이후 독일의 변화
다하우 수용소는 미군이 1945년 4월 점령할 당시 25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막사에 1,200명씩 32개동에 수용돼 있었고, 4,000구 이상의 시체를 찾아냈다고 한다. 유럽 전역에 이러한 강제 노역을 당한 사람은 4천만 명, 유태인 희생자는 7백만 명(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유태인은 9백만 명), 슬라브족, 집시, 장애인, 정치범 4백만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보고된다.
이후 별다른 반성 없이 경제복구만을 위해 얼마를 지내다 유럽과 미국에 번진 68혁명을 독일도 맞게 된다.
각국 젊은 대학생들이 정의와 평화를 외치기 시작하자 독일 청년들의 입에서 홀로코스트의 책임을 기성세대에게 따져 묻게 된 것이다.

1) 평범한 시민들까지 나치에 협력한 이유
2)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이에 독일의 부모 세대와 젊은이들은 토론과 논쟁을 이어가며 책임지고 반성해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으기 시작했다. 역사학자 마르티나 피셔박사는 “독일의 역사 반성은 시민 사회가 중점적 역할을 했다”며 거기에 용기 있는 정치가들과 학계가 힘을 모아 주었다고 말한다. 그 시작은 미약했으나 1999년 말, 슈뢰더 총리가 ‘기억, 책임, 미래 재단’을 만들어 강제노역자 중 생존해있는 170만 명에게 배상을 하게 하며 당시에 그 노동력으로 이득을 얻은 바이엘, BASF 등 굴지의 회사들이 출자해 미국 등지에서 청구하는 대로 차례로 지급하고 있다.
이어 메르켈 총리가 “잘못을 깨닫는 것은 독일인 모두의 의무이다”, “역사에는 결말이 없다”는 말을 하며 가장 피해가 컸던 폴란드와의 화해를 추구하고 나서며 독일은 가장 많이 변화한 나라라는 인상을 받고 있다. 이들이 지금도 기억의 장소들을 하나씩 복원하며 그때의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은 실로 놀라운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 방문자 센터에서도 때때로 수용소 생존자들이 나와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는 프로그램을 가진다고 한다.

우리가 베트남과 필리핀에서 행한 일들
이제 우리의 입장을 생각해볼 차례다. 사과하지 않는 일본에게 우리가 받은 피해의 증언과 함께 우리도 청산해 나가야 할 일들이 있다.
베트남전에서 우리 군이 저지른 꽝남 학살로 희생된 수는 1만 명가량이라 한다. 하미, 퐁니, 퐁넛 마을의 참상이 증언에 의해 밝혀지고 있는데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은 모양새다. 우리도 민간 시민 단체가 나서서 과거를 책임지고 반성하도록 촉구해야 정치권이 움직일 거 같다. 또 한 가지는 필리핀에 있는 한인 아버지를 가진 일명 코피아 문제다. 개인의 비도덕적인 문제로 치부하기엔 그 숫자가 많고 한국 자손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이 역시 역사의 과도기에서 일어난 우리의 문제였기에 우리가 안고 가야 할 책임이 있다. 어떻게든 그들이 억울함을 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길을 마련해야 한다.

독일=전영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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