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1762년)를 보면, 새와 맹수조차 감동을 시킬 만큼 탁월한 리라연주와 노래의 사람이었던 오르페우스의 아내 에우리디체가 그를 연모하던 목동 ‘아리스타이오스’라는 청년으로부터 도망을 치다 뱀에 물려 죽게 됩니다.
죽은 아내를 다시 지상으로 데려오기 위해 명계(冥界)로 찾아간 오르페우스, 결국 하계(下界)로부터 ‘지상에 다다르기 전에 결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단 하나의 조건 아래 아내를 지상으로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습니다.
그러나 지상으로 가던 중 영혼만 있는 에우리디체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불안했던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봅니다. 그 순간 에우리디체는 다시 지하세계로 사라집니다.
비록 문학적 허구를 원작으로 창작한 오페라지만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조건을 어겨 아내를 다시 잃어버리는 비극을 자초한 오르페우스의 모습이, 소돔이 그리워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 삶을 마친 롯의 아내와 너무 닮았습니다(창세기 19:26).
창세기 기자가 롯의 아내를 묘사할 때 선택한 ‘뒤’란 낱말의 히브리어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곧 ‘공간적 의미’의 ‘뒤’와 ‘시간적 의미’의 ‘뒤’를 함께 포괄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롯의 아내에게 있어 ‘뒤’란 자기 뒤에 있는 소돔이란 공간적 도시를 돌아보았다는 의미와 더불어, 과거 자신이 소돔에서 누렸던 그 시절의 향수와 추억을 되새기며 돌아보았다는 의미가 중첩된 행위였습니다.
마치 출애굽 이후 광야의 열악한 조건에 고통스러울 때마다 과거 이집트의 삶을 그리워하며 다시 돌아가려했던 이스라엘처럼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탁월했던 점은 약속의 땅에 진입한 첫 해에 심한 기근을 만났지만 ‘뒤를 돌아보아’ 갈대아 우르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패한 사람의 특징은 ‘그들의 시선’이 항상 ‘뒤’에 있다는 것입니다. 곧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에 대한 지독한 향수에 도취되어 시간과 감정을 낭비합니다.

그러나 깨어있는 사람의 시선은 ‘위’와 ‘앞’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생의 허비’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을 지칭하는 어휘로 ‘안드로포스(ανδροπος)’를 선택했습니다. ‘안드로포스’란 ‘위를 쳐다보는 자’란 의미를 갖습니다. 먹이를 구하기 위해 ‘땅’만 응시하는 짐승과 구별된 존재, 그래서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갈망하는 심장으로 하늘을 응시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그들의 ‘인간이해’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렇습니다. ‘뒤’만 바라보는 ‘회고적 존재’로 살아서는 위험합니다. 물론 과거의 회고에서 약간의 교훈과 위로를 받을 수는 있지만 그 과거가 미래를 만들어내는 ‘원자재’는 아닙니다. ‘미래’는 지금 그대가 사는 ‘현재’를 통해 창조되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로마인은 가장 현명한 삶의 방식을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카르페 디엠’이란 ‘지금을 살라’란 뜻입니다. 이는 자신이 속한 ‘지금’에 충실할 때 자신이 기대하는 ‘미래’를 선물로 받게 된다는 경구일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작가 아이스퀼로스는 “새는 뒤를 보지 않는다. 그래서 멀리 날 수 있다”라고 시적어구를 들려줍니다. 겨울을 만난 철새들은 먹이확보를 위해 먼 남쪽으로 이동합니다. 특히 북극제비갈매기는 남극을 향해 19,000Km의 ‘죽음과 같은 긴 여정’을 떠납니다. 이때 모든 새들은 시선을 ‘앞’에만 두고 비행합니다. 결코 ‘뒤’를 보지 않습니다. 그 결과 그 ‘먼 거리’를 무사히 완주하여 ‘내년 봄’을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그대의 시선은 어느 쪽인지요?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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