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배우 예수정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이하 신과 함께)을 관람한 1400만 명의 관객들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판타지에도 환호했지만, 죽음을 맞게 된 주인공 자홍(차태현 분) 형제가 결국 마지막에 깨닫게 된 ‘어머니의 사랑’을 함께 맞닥뜨리며 눈물을 훔쳤다. 말을 못 하는, 그러나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어머니 역할을 연기한 배우 예수정씨. 드라마 <마더>에서는 주인공에게 힘을 실어주는 보육원 원장 선생님으로, 영화 <부산행>에서는 타인을 위해 희생했던 할머니 등으로 분하며 요즘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누비고 있다.
“사람들에게 제 이름을 이렇게 소개해요. 예수님 할 때 ‘예수’, 그리고 ‘정’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식사하시러 가는 한식당 이름 같다고 웃으며 농담들 하시지요.”
강남의 한 카페에서 늦은 저녁 인터뷰를 가졌다. 연극연습을 마치고 저녁식사도 못 한 채 숨가쁘게 달려온 예수정 씨가 소녀처럼 웃으며 그렇게 자기 이름을 소개한다.

연극에 빠지게 되었다
1979년 연극 <고독이라는 이름의 연인>으로 데뷔한 예수정 씨는 유명 연극인으로, 최근에는 영화, 드라마까지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은회색 머리카락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다. 예수정 씨는 그러나 같은 이미지를 전하지는 않는다. 서글픈 어머니에서부터 강단 있게 자리를 지키는 어머니까지. 생각해보니 예수정 씨의 어머니이자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할머니 역을 맡았던 배우 정애란 씨와 겹쳐 보이는 부분이 있다. 자애로우며 때로는 여려 보이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고 지킬 때는 강한 어머니.
“어머니가 연극을 하셔서 어려서부터 극장이란 공간이 너무나 익숙했어요. 젖먹이 때부터 극장에 있었고, 5살 때부터는 객석 맨 앞줄에서 연극을 봤으니까요. 대학교 1학년 때 영화 <대부>의 말론 브랜도를 보고 충격을 받고 곧장 독일문화원의 대학생 극회를 찾아갔어요. 한 번만이라도 저렇게 살아봤으면 하는 마음이었지요. 그 당시만 해도 배우가 사회적으로 대접을 못 받는 시대였기 때문에 어머니가 고생한다고 반대를 심하게 하셨어요. 배우하려고 몰래 대학원에 들어갔고 새벽시간에 나와 연극연습을 하곤 했지요. 정말 하고 싶었고, 할 수밖에 없었지요.”

고려대에서 학부에 이어 대학원까지 독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독일로 연극학을 공부하기 위해 떠났다.
“대학시절 독문학을 전공하며 독일의 시인·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만나게 되었어요. ‘극장은 시민 계몽공간이다’라고 한 브레히트의 극장에 대한 정의가 제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지요. 거대한 기관이 사회를 바꾸는 힘이 있다고 믿지 않아요. 작은 동아리, 동네 소모임 등이 더 힘이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그의 땅으로 날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독일 뮌헨대에서 연극학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1991년 한국으로 돌아와 연극 연출을 하게 되었고 이후에는 서울예대에서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던 그녀에게는 유명한 ‘자랑’이 있다.
“제가 스스로를 40년 무명배우라고 하는데, 그건 자랑삼아 하는 말이에요. 얼마나 좋았으면 그랬을까, 그렇게 좋아하는 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요. 또한 연극하는 사람은 서로 굶을까봐 걱정해줘요. ‘고생하는 힘’을 갖고 있어요. ‘뭐가 빨리 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배우지요. 천천히, 그러나 꼼꼼히 걸으면서 누구 하나 튀지 않고 작품을 이뤄 가는데 그 긴 연습과정 속에서 스스로 깨치면서 알게 되지요.”

어떻게 작품을 선택하는지에 대해 묻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배우란 직업은 수동적이어서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선택당합니다. 감사하게도 다양한 주제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어요. 젊었을 때는 사회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을 좋아했다면 나이가 들어서는 인간의 약점, 선한 의지 등을 주제로 다루는 작품을 하게 됩니다. ‘나는 누굴까?’, ‘삶이란 무엇일까?’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계속 해나가며 문을 하나 넘어설 때마다 더 아름다운 길이 있을 것 같은 기쁨이 찾아올 때, 조금씩이나마 제 자신을 정리하고 감히 그 힘으로 무대에 섭니다.”

묵묵히 십자가 지신 예수님 바라보다
배우 예수정 씨는 크리스천이다. 믿음, 신앙이란 말을 붙이기도 부끄러운 자신이라고 했지만 어떻게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보게 되었는지 그 순간을 또렷하게 이야기했다.
“제 주위에는 예수님을 아는 사람도, 믿는 사람도 없었어요. 그런데 미션스쿨인 숭의중고등학교를 다녔거든요. 채플 시간이 처음에는 낯설었는데 성경을 읽다보니까 예수님을 죽이고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아니, 그렇게 사랑하고 품었던 이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 어떻게 한 마디도 안하실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학생 마음에 거의 충격이었지요. 십자가를 ‘묵묵히’ 지신 주님께 압도된 시간이었다 할까요.”
이후 이 ‘침묵하시는 주님’은 그녀가 작품을 할 때마다 다시 만나게 된다.
“작품을 하면서 캐릭터를 구축해 나갈 때 결국 깊이 깨닫게 됩니다. ‘아, 역시 나는 사랑이 부족하구나.’ 진심으로 용서나, 사랑을 해야 하는 작품을 할 때마다 턱턱 막히기도 했어요.”

영화 <신과 함께> 속에서 마지막 저승 재판을 남긴 아들에게 꿈을 통해 나타나 그녀는 이렇게 전한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하나님께서 부족한 나를 늘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그러한 ‘만지심’이 작품 속에서 나올 수 있겠지요. 자신을 죽이려 했던 아들의 마음을 엄마는 알았을 거예요. 얘가 무슨 일을 하든 ‘얼마나 힘들었으면’ 하면서 받아들이는 엄마의 마음. 주님이 묵묵히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받아들인 것’이지요. 제가 그런 주님을 ‘흘끗이라도’ 봤기 때문에 제 무의식중에 연기로 나올 수도 있겠지요.”
자신 안에 있었던 감동들이 작품 속에 녹아나왔을 것이라고. 아무 말 없이, 원망 없이 아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어머니.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

최근에는 연극에 출연하고 있다. 고연옥 작가가 각색한 <엘렉트라>는 고대 그리스 작가 소포클레스의 비극이 원작으로 4월 26일부터 5월 5일까지 서울 강남구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하고 있다.
또한 개봉예정작 영화 <허스토리>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역할을 맡았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벌인 많은 법정 투쟁 중에 전무후무하게도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아내어 일본 사법부의 쿠테타로 불리었던 관부 재판 실화를 그린 영화로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 동안 23회에 걸쳐 일본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며 일본정부를 상대로 10명의 할머니 원고단과 그들의 승소를 위해 함께 싸웠던 이들의 이야기다.
“여성으로나 한 명의 개인으로서나 말하기 어려운 고백을 함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면, 큰 의미가 있는 일이겠지요. 어렵지만 커튼을 젖히고 나오는 것이구요. 영화는 ‘인간은 언제까지 개인적인 입장에만 머무를 것이냐’고 도전합니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공적인 입장으로 자신의 자리를 자리매김할 때 고통당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고, 들여다보는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연기자로서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 전해왔던 배우 예수정씨. 그가 40년 동안 연기자의 자리에서 하고 싶었던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빈 공간을, 먼 거리를 좁히기 위한 그녀만의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예수님이 사람으로 이 땅에 내려와 사람처럼 죽어갈 때 묵묵히 그 짐을 짊어졌던 것처럼, 배우로 살아가며 현실과 실천 사이에 서서 ‘어둠에서 빛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