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곤지암>

2012년 CNN이 세계에서 가장 기괴한 장소 일곱 군데를 선정해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 이후 폐허가 된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의 놀이공원, 수많은 유골로 가득 찬 체코 세들렉 납골당, 자살 장소로 유명한 일본 후지산 자락의 아오키가하라 숲, 부두교 주술 재료를 거래하는 아프리카 토고의 아코데싸와 동물 부적 시장, 멕시코 테수일로 호수에 있는 인형의 섬, 그리고 일본의 군함도. 이상 여섯 지역에 더해 우리나라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곤지암 정신병원이 선정됐지요.

그들이 끌린 이유
이 곤지암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한 공포영화 <곤지암>이 극장가 비수기라 할 수 있는 3~4월에 깜짝 흥행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주인공 위하준은 소름 끼치는 공간을 생방송으로 중계하는 인터넷 전문채널 ‘호러타임즈’를 운영하고 있어요. 그가 이번엔 1979년 병원장과 환자들이 집단 자살했다는 곤지암 정신병원 402호를 둘러싼 괴담의 실체를 밝혀보고자 합니다. 402호는 절대로 열리지 않는 방으로, 거길 열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는 곳이죠. 영화는 리더 위하준의 지휘 아래, 6명의 대원이 이 곤지암 정신병원을 탐사하는 과정을 가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보여줍니다.
이 7명이 단지 짜릿한 전율을 즐기고 싶어서 이 프로젝트에 뛰어든 것만은 아닙니다. 대중으로부터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그들을 결정적으로 그곳으로 이끌었지요. 으레 그렇듯, 등장인물들은 무모할 정도의 자신감을 초반에 내비칩니다. 게다가 방송 성공에 따른 엄청난 광고 수익에 대한 기대감은 그들을 더욱 흥분하게 만들지요. 물론 그런 자만심은 이내 좌절을 겪게 되고, 돈에 대한 탐욕은 그들을 더욱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습니다.

공간의 기억
지나친 오만을 뜻하는 ‘휴브리스’(hubris)는 자신의 능력을 절대적 진리로 믿고 과거로부터 해왔던 방식대로 일을 밀어붙이는 걸 말합니다. 한마디로 자신에 대한 우상화 작업인 거죠. 이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셰익스피어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비극적 주인공이 보여준 전형적 모습입니다. 겸손과 절제의 덕을 잃은 자가 비극적 결말로 내몰리는 영화 속 이런 전개는 그다지 특별할 게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모든 결정을 돋운 결정적 계기에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곤지암 정신병원이라는 공간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는 대부분 사실이 아닙니다. 병원장과 관련한 소문을 비롯해 40년 전에 벌어졌다는 집단 자살 사건 등 영화에 나오는 곤지암 정신병원을 둘러싼 설정들은 그저 영화를 위해 감독이 만들어낸 픽션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실제 이 병원의 역사는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어요. 90년대에 잠깐 운영되었다가 20년 전 폐업한 병원일 뿐입니다. 그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가득한 폐건물인데, 어느 날 갑자기 이 건물을 두고 온갖 뜬소문이 돌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공포체험을 위해 여길 찾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 지역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해졌답니다. 현지인 입장에선 공포 체험하겠다고 몰려드는 그런 외지인들이 오히려 더 ̒공포스러운̓ 아이러니한 상황인 거죠.
우리는 흔히 사람이 공간을 채우고, 만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뒤집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혹시 공간이 사람을 만들어가는 건 아닐까요? 아무리 외모를 성형한다고 해도 그 사람의 태도와 성격 같은 내면은 여전하듯이, 공간 또한 아무리 사용처가 바뀌었다고 해도 그 아우라는 남아있게 됩니다.
‘팰림프세스트’(Palimpsest)는 양피지 위에 원래의 글을 지우고 다시 쓴 고대 문서를 말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아무리 지우고 그 위에 덧씌운다고 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흔적이 남아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공간 또한 그 용도를 다했다 해도, 더 나아가 부수고 다른 것을 지어도 그 땅은 그 이전 공간을 기억합니다.

현재 정신병원은 아니지만, 곤지암은 여전히 내면의 불안과 병적 증세라는 정체성을 가진 땅입니다. 심지어 관리까지 안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 인간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분열적인 면모를 증폭시켜놓은 상태입니다. 이런 공간적 특수성이 수많은 뜬소문과 영화적 상상력을 가져왔어요. 사람이 공포 분위기를 조장한 것이 아니라, 공간이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를 끄집어내도록 한 거지요. 영화 속 인물들이 정신병이라는 비이성에 맞서 이성의 우월함을 내비친 것 또한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린,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그곳이 어떻게 꾸며져 있는지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밟고 서 있는 땅이 곧 나의 정체성이요, 내 얼굴이 되니까요.

임택
단국대학교 초빙교수. 미국 오하이오대학교에서 영화이론을 수학하고, 대학에서 영화학과 미학을 강의하며, 철학과 인문학을 통해 영화를 독해하고, 시대와 소통하는 방법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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