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마침표, 찍어가는 것

한동안, 인터넷에 이름이 오를까 두려워 잠을 설친다는 사람들 얘기를 해가며 실시간 검색 인물들에 최고의 관심이 쏠린 날들이 이어졌다. 삶을 위한 기본 욕망이 이처럼 왜곡된 모습으로 만천하에 드러난 적이 있었을까.

문득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생각났다.
이 작품에서 여주인공 블랑쉬는 자신의 지난날을 속이고 교양 있는 숙녀로 등장하지만 그의 내면은 ‘나방같이 바스라지기 쉬운’ 상태로 표현된다. 반면 동생의 남편 스탠리는 원색 옷을 입고 생고기를 즐기는 모습으로 야생동물을 연상케 하다 급기야 블랑쉬를 겁탈하고 정신병원에 가게 한다. 이때 방 안에 알전구를 감싸는 얇은 종이 갓이 욕망을 따르는 환경의 취약함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의 시대와 비교했을 때 이러한 상징이 꼭 들어맞지는 않지만, 부끄러움을 모르는 쾌락주의자들이 삶의 동력을 오로지 육체에서 찾아 경쟁에서 이기려는 듯 생각없이 마음과 몸에 상처 주는 점이 비슷하다. 이들은 욕구를 이루면서 무모한 희열을 느끼나 육체와 정서의 혼란 가운데 점점 허기진 내면을 갖게 되고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본능과 반대 방향인 어둠의 끝을 향해 가게 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쪽에 끌려 살게 된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자신의 천국을 찾으며 사는 거라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방향을 잘 잡아야 하는데 일찍이 말초적인 쾌락에 맛을 들이면 일상 속 즐거움은 싱겁게 느껴져 다른 건전한 세계를 즐길 수 없게 된다. 특히 쾌락의 문제는 사춘기가 가장 중요해 그 이전에 ‘자기 존중감’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으면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몸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르게 된다. ‘말’도 마찬가지. 품격 있는 사람이 되려면 품(品)~입이 셋 모인 말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도 한다.
그러면 공부를 많이 한 교수, 박사, 유명인들이 왜 이런 문제에 연루되었을까.
그것은 지식이나 인기, 명예를 최고로 여기며 이기적인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사람을 귀히 여기는 분위기, 겉과 속이 비슷한 가정에서 성장했다면 이렇게 상처 주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미투에 여러 사람들이 용기 내어 나서며 사회를 환기시켰지만 정작 더 큰일을 당한 사람들은 나서지 못했다. 그들은 그 어둠의 트라우마를 입에 올릴 힘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심히 가련한 상태이거나 철저히 이중적인 삶을 살며 다시는 기억해내고 싶지 않은 시간들을 슬퍼하고 있을지 모른다.

뒤돌아 짚어보니
중년 이상의 사람들은 ‘성희롱, 성폭력’이란 말을 배워본 적이 없다고 한다. 어떤 이는 상대가 자신을 좋아해서 다가오는 방법이라 여겼다고도 한다. 그러니 남자들 가운데 어떤 이는 동물과 달리 욕망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속으로 항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제대로 듣거나 배우지 못했으니 암암리에 나름대로 터득해 그게 자유로운 삶이라 여겼고 소설이나 영화, 듣는 얘기들 속의 수북한 가부장적 참사들이 죄로 논의되기보다 수컷의 본능으로 묘사해 묵시적 허용을 한 점도 있다고 말이다.

이제 무엇을 가르쳐야 하나
이 점은 가정에서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사춘기를 앞둔 교회 교육부에서 가르칠 때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된다.
첫째,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은 사람의 눈만 피해서 될 것이 아니라는 점. 이 말은 전 세대 누구에게나 해당되지만 특히 사춘기를 지내는 청소년들에게 매우 유효한 지침이 되는 것은 보는 눈이 없을 때의 행동이 자존감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둘째, 쾌락의 위험성을 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쾌락은 육체를 탐닉하는 것과 함께 지나친 디지털 게임, 욕이나 거친 말, 중독성 약물 등이 포함된다. 이런 것들에 노출이 먼저 되면 공부는 물론 악기 연주나 운동에 흥미가 떨어지고, 가정에서의 대화와 인간적 따스함도 피상적으로 느껴짐을 알게 해야 한다.
셋째, 우리 몸은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성전이므로 몸을 상하지 않게 간수해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몸도 귀히 여겨야 함을 말해야 한다.
그리고 예술이나 작품을 좇기 위해서 내 인생을 버릴 수 있을지도 생각해보게 한다. 가정을 잘 이루며 신앙 양심 안에서 미술이나 음악, 영화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알려주고 이 모두가 자신의 선택에 달렸음을 인지시킨다.

포부를 가르쳐라
배철현 교수(서울대학교 종교학과)는 칼럼을 통해 “세상에는 ‘욕망을 추구’하거나 ‘포부를 수련’하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하며 동물적 삶의 쓰라림이나 무모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은혜’라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경지에 들어가려는 노력’인 포부(aspiration)를 위해서는, 욕망을 따르는 삶에 넌더리를 내고 돌아서야 하기 때문이리라. 그 포부는 유지하고 이어가기가 쉽지 않아 ‘더 나은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매일 확인하며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방법은 성공이나 명예, 권력을 추구하기 전에 내가 되고 싶은 것을 고요함 속에 떠올리는 시간을 갖는 것이라고 배 교수는 제안한다.
썩은 물고기 먹는 일 외에 높이 떠올라 더 넓게 바라봐야 한다던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이 생각난다.

전영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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