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여성연합회 윤영애 전 총무

중앙대 사회학과 이나영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를 흔든 미투 운동의 원조는 일본군 성노예제로 고통당하셨던 김학순 할머니의 커밍아웃입니다.…차별구조에 저항했던 여성들의 역사 속에서 미투 운동은 맥락을 이어가야 합니다.”
윤영애 전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이하 교여연) 총무(사진 위)로부터 김학순 할머니의 스토리를 듣고자 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는 할머니를 역사의 증언대로 초청한 분으로 기생관광 폐지, 부천경찰서 권인숙 씨 성고문 사건, 미군에 의한 윤금이 씨 살해사건 등 그야말로 우리 현대사에 얼룩진 여성들의 참혹한 핍박에 대해 누구보다 더 가까운 현장에서 그들의 편이 되어 일한 증인이기도 하다.

Q. 처음 일본군 ‘위안부’ 사건을 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망언이 기록된 1990년 6월 6일자 일본 의회 예산위원회 회의록을 입수하게 되었어요. 제가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이하 교여연) 총무로서 2기 임기를 막 시작할 무렵이었지요. 일본 정부는 “종군위안부는 민간업자가 데리고 있었던 것 같고 실태조사는 할 수 없다”고 의회에 보고했습니다. 우리는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다시 몇 차례의 회의를 거쳐 범국가적 차원에서, 그리고 여성운동 차원에서 ‘정신대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를 조직했습니다. 그날이 1990년 11월 16일이었어요.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모태가 되었고, 사무실도 교여연 사무실을 함께 쓰면서, 제가 총무대리를 맡고 교여연 직원이 간사가 됐어요. 당시 정대협은 일본대사관과 한국 정부에 6개 항목의 공개질의서를 보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➀ 조선인 여성들을 위안부로 강제 연행한 사실을 인정할 것
➁ 공식적으로 사죄할 것
➂ 만행의 전모를 스스로 밝힐 것
➃ 희생자들을 위하여 위령비를 세울 것
➄ 생존자와 유족들에게 보상할 것
➅ 역사책에 기록하여 교육할 것


Q. 직접 일본을 방문해서 정부에 공개서한을 전달하기도 하셨지요?
공개서한만으로 마음이 안 놓였어요. 할머니들이 희생된 일본의 도카시키 섬으로 직접 가서 추모해야겠다 생각했죠. 도카시키 섬은 오키나와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데 이곳에서 일본군 1000여 명이 한국인 위안부 6명에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거든요.
추모제를 드리기 위해 출항한 그해 10월 26일을 잊지 못합니다. 오키나와의 바다는 여전히 검푸르게 출렁거렸는데, 저는 바다를 보며 50년 전 이 바다를 바라보며 두려움에 떨었을 열일곱 살짜리 소녀들을 떠올렸습니다. 제 딸아이가 꼭 열일곱 살이었어요. 그 두려움과 공포를 온몸으로 공감할 수 있었죠. 얼마나 무서웠을까?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마치 아이들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했어요.
나라 잃은 엄마들은 그렇게 제 자식조차 지킬 수 없었습니다. 50년 전에도, 50년이 흐른 후에도 오키나와의 바다는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증언해야 할 목격자들이 침묵하면 역사는 한없이 왜곡되고 피해자들의 억울한 희생은 풀리기는커녕 더욱 곪아서 더 큰 희생으로 이어지죠. 그게 역사예요. 추모제를 위해 태극기를 달고 나선 이 길이 소녀들을 데려오기 위한 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죠. 그때 동행한 일본인 여성이 “윤상, 왜 그렇게 울어요?” 하고 말했어요. 저는 “내 딸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했더니 “내 딸? 우린 그렇게 생각해보지 못 했어요”라고 하더군요.
저는 도쿄 의회를 방문해 참의원들과 여성단체의 관계자들 앞에서 우리의 결심과 요구사항을 전하고 그들로부터 함께 연대할 것이라는 약속을 이끌어내며, 일본 외무성에 가서 공개서한을 전달했습니다.

Q. 일본 대사관 앞에서의 수요집회가 28년째 계속되고 있는데, 그 출발은 어떠했나요?
일본에서 돌아와서도 정대협 일로 분주했습니다. 일본대사관 앞 다방에서 이효재 선생님과 만나 공개서한에 담은 6개 항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계속해서 집회를 열자고 했어요. 우리는 매주 월요일에 일본대사관을 돌면서 시위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저는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의 망령이 여리고성처럼 무너지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돌았어요.
그 이후 집회는 다른 단체들의 상황에 맞춰 수요일로 옮겨져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죠. 대사관을 도는 행위는 할머니들이 힘드셔서 그만두었습니다.

Q. 김학순 할머니를 만나게 된 계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 후 다시 두 차례 더 서한을 보내고 답을 기다리던 중 1991년 4월 24일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일본 정부의 답을 전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정대협 대표 몇 사람이 갔는데, 당시 오노 참사관은 일본 정부의 답을 구두로 전해주었어요. 즉, “조사 결과 일본 정부가 위안부를 강제 연행한 사실이 없고 보상문제는 지난 1965년 한일청구협상 체결로 국제법상 양국 간의 권리와 의무가 끝났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거였죠.
우리는 공개서한을 보냈으니 공식적인 서신을 달라고 요청했고, 오노 참사관은 문서는 없으며 구두로만 받은 답변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말한 내용이라도 문서로 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했어요. 그러면서 “현재는 증거가 없으나 만약 증거가 나온다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볼 문제이다”라고 여지를 남겼어요. 우리는 기어코 증언자를 찾아내야 했어요. 당시 교여연은 원폭 피해자 할머니들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그분들에게 오노 참사관 이야기를 전하며 어떻게든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피해자 할머니들을 찾아내야 한다고 도움을 요청했지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원폭 피해자 1세인 이맹희 할머니가 취로사업도 같이 하고 연동교회도 같이 다니는 한 분으로부터 정신대(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간곡하게 “할머니 제발 그분을 한 번 모셔오세요” 하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리고 1991년 7월의 무더운 어느 날이었어요. 우리는 원폭 피해자 2세들과 ‘반전 반핵 평화’ 운동을 위한 연극을 준비하고 있었죠. 이 연극의 주연을 맡은 이맹희 할머니가 늦게 연습실에 들어오시며 저를 찾으며 말했어요.
“윤 총무 이이가 바로 그 사람이에요. 정신대 할머니요.”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얼마나 가슴이 요동쳤는지 몰라요. 산 증인을 찾아내려고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그 엄청난 역사적 사건을 겪어내신 분이 내 앞에 막상 서 계시니, 저는 그 큰일을 감히 혼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흥분할 수밖에요.

Q. 할머니의 첫 인상은 어땠나요?
예쁘장하고 가냘픈 몸매, 지병인 천식으로 가쁜 숨을 내쉬며 수심에 가득 찬 모습, 그분이 바로 김학순 할머니였어요. 수십 년이 흘렀으나 지금도 눈에 선한 그 얼굴! 저는 “녹음을 해도 될까요?” 하고 물었고, 할머니는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말씀하셨어요.
“예. 그리하세요. 내가 여기 올 적에는 모든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예요. 역사의 증언을 하려고 온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데 저들이 어찌 저리 뻔뻔하게 안 그랬다 말할 수 있습니까.”
할머니는 그러면서 응어리진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리고는 한이 서린 오래된 보따리를 풀어놓으셨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일본 군인들이 열일곱 살짜리 어린 여자아이에게 달려들어 짐승 같은 짓을 했다고, 아무리 소리 쳐도 도와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할머니는 흐느끼며 엄마를 부르던 때를 떠올리다 한동안 말문이 막히는지 멍하니 벽만 바라보셨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건 분명 이 때를 위함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만나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그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당신이 당한 일을 세상에 남김없이 증언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해 광복절을 하루 앞둔 8월 14일, 할머니는 기자회견을 통해 산천도 놀라고 초목도 통곡할 그 한 많은 사연을 낱낱이 폭로했습니다.

Q. 할머니의 증언 이후 어떤 변화들이 일어났습니까?
그 후 TV와 신문으로 이 소식을 접한 다른 할머니들이 용기를 얻어 피해자 신고를 하고, 숨어 살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이 이어졌습니다.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 덕분에 영원히 묻고자 했던 일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았어요. 할머니의 증언은 무엇보다 부끄러운 과거를 왜 들춰내느냐고 비아냥거리던 사람들, 일본의 사관으로 역사를 본 역사학자들, 일본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관료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UN을 비롯해 세계의 눈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직시하게 되었고,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분위기로 흘러갔습니다.

Q. 그러고 보면 역사의 진보는 언제나 가장 억압받고 소외된 자들이 일어설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목도하게 됩니다.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미투 운동 역시 그런 맥락에서 봐야겠지요?
맞습니다. 그래서 양심적인 세계의 시민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어 일본의 저 야만스런 위안부 피해자 만행에 대해 속속들이 고발하고 사과와 보상을 촉구해야 합니다. 수많은 증언과 증거들을 제시해도 여전히 사실조차 부인하는 일본 정부를 향해 그 범죄적 사실을 고발하고 용서를 빌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미투 운동’의 역사적 뿌리를 보다 튼튼히 가지게 될 것입니다.

박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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