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남자는 쇼핑을 좋아해>

<남자는 쇼핑을 좋아해> 무라카미 류 지음, 권남희 옮김, 민음사, 2017년, 166쪽

남자라고 해서 쇼핑을 싫어할 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무미건조해 보이는 남자들의 표정을 한 명도 아니고 한꺼번에 여러 명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백화점 수유실 앞이다.
아기 엄마들의 성화에 운전기사 내지는 짐꾼이라는 내키지 않는 임무를 부여받은 아기 아빠들로 주말의 백화점 수유실 앞은 오늘도 만원이다. 그들의 모양새는 한결같다. 일단 입구에 유모차를 줄지어 주차시키고, 아기 엄마가 모유나 분유 혹은 이유식을 다 먹일 때까지 시중을 들며 하릴없이 기다린다. 각자 알아서 좁은 공간에 용케도 자리를 잡았는데, 붙어 앉거나 마주 앉아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아기 아빠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마음일지 예상이 된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렇게 시작한 쇼핑은 아기가 지루해 하는 순간부터 위기가 시작되는데, 애써 준비한 유모차는 본래의 기능을 잃고 쇼핑한 물건들을 싣는 카트로 변신하고 아기는 아빠 품에 엉겨 붙어 10킬로그램을 전후한 찰떡같은 짐으로 바뀐다. 설상가상이란 백화점에서 쇼핑을 마친 후 사은품을 기어코 받으려는 아내를 따라 아기와 유모차, 이유식 가방 및 옷가지 등을 가까스로 주렁주렁 챙겨 찾아간 행사장이 다른 곳으로 바뀌었다는 안내문을 맞닥뜨릴 경우 너무도 잘 어울리는 말이다.
이쯤 되면 오늘의 짐꾼 아기 아빠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른다.
“그냥 가자. 만 원짜리 사은품이란 거 받아가도 사용하지 않잖아. 아기도 울고 난리인데….” 아기의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나와 같다며 설득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얌체 같은 아빠”라는 퉁명스런 대답일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남자의 쇼핑이란 이렇게 고통의 연속일 때가 많다. 그러다 남자가 과도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를 애써 피하거나 혹은 공격적으로 반응하면 여자들은 이를 남자의 책임 회피 내지는 짜증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남자들이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자가 쇼핑을 본능적으로 싫어할 이유가 별로 없다. 무라카미 류가 쓴 <남자는 쇼핑을 좋아해>를 읽으면 남자의 쇼핑이 어떻게 즐거워질 수 있는지 단초를 제공한다.
문학 작가면서 영화감독인 무라카미 류의 이력 가운데 일본 축구 레전드 나카타 히데토시의 열렬한 팬으로서 축구 평론가로 활동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일하는 행복이 본업보다는 취미일 때 빛을 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무라카미 류에게도 해당하는 듯하다.
특별한 직업이 없을 때 일주일 만에 썼다는 첫 번째 소설이 130만 부가 넘게 팔린 이후 이를 넘어서는 책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지만, <남자는 쇼핑을 좋아해>에서 보이듯 잉여롭고 사사로운 취미생활에 가까운 축구 평론가로 일할 때 무라카미 류의 모습에서는 반짝반짝 즐거움이 넘친다. 축구 경기를 보려고 찾아간 이탈리아 밀라노, 로마, 볼로냐, 페루자, 피렌체 등에서 블루 셔츠와 수제 구두, 쿨 비즈 바지 등 질 좋은 명품을 구입하고, 오래된 맛집을 찾아 배를 채운 다음, 대절 택시를 이용해 숙소로 향하는 남자의 하루란 여자들이 보내는 쇼핑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남자들이 경험한 쇼핑이 엄마나 여자친구, 그리고 아내로 대표되는 여자의,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쇼핑이었다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

며칠 전에 미용실을 다녀오다가 옷가게에 들려서 날씨가 따듯해지면 입을 ‘이태리풍’ 파란 셔츠를 장만했다(무라카미 류를 만난 이후 파란 셔츠는 무조건 ‘이태리풍’이라고 떠벌리고 있다). 사랑하는 셔츠가 선반에 잠들어 있고, 함께 입으면 어울릴 것 같은 슈트와 핏이 좋은 바지가 옷장 안에서 살랑살랑 흔들거린다. 아직은 날이 차서 당분간 입을 일이 없지만, 오늘 아침에도 나는 새 옷을 향해 “곧 만나자” 하고 속삭인 다음 출근을 서둘렀다. 봄에 잘 차려 입고 나서면 옷들이 알아서 “난 평범한 직장인이 아닙니다” 하고 대신 말해 줄 것 같은 설렘이 기분 좋다.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전에는 디자인하우스에서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스포일러 성격의 리뷰 글보다는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해져서 일부러 책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자는 무모한 목표를 설정하고 연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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