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사람이 온다’는 ‘자서전 쓰기학교’에서 만난 소중한 이야기들을 담는 코너입니다.

“먼저 일어날게요.”
“왜? 벌써 가게? 이러면 분위기 깨지는데….”
“미안해요. 가서 할 일이 있어요.”
P는 붙잡는 동료들의 부탁을 뿌리치고 자리를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P가 사라진 회식 자리에서 그의 자기 관리 또는 배려 없는 이기심에 대해 한 마디씩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내일 아침에 일이 있다고 하잖아. 확실한 자기 관리… 부러운 걸.”
“그래도 오랜만의 회식인데 혼자 가버리면 다른 사람들 기분은 뭐가 됩니까?”
“맞아요. P 선배는 이기적이에요.”
직원들은 P의 자기 관리 스타일을 나무라는 쪽으로 의견을 모아갔다. 누군가 P의 성장과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까지는….

살아내야 했던 시간
“P…열네 살 때 엄마아빠 잃고 형 누나와 함께 살았대요.”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사람들의 시끄럽던 입을 한순간에 닫아버렸다. 우리들 중에는 부모를 잃고 형 누나와 살아본 사람이 없었으므로.
“형 누나와 살다 보니 어려서부터 자기가 먹은 그릇 설거지부터 옷 양말 신발 빨래에다, 자잘한 집안 청소까지 스스로 해야 했대요. 그날 해야 할 일은 어떻게든 그날 꼭 해야 했대요. 형과 누나가 학교 다니랴, 아르바이트 다니랴 바빴고 어린 P로선 미안한 마음에 눈치를 보면서 살았던 거죠.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이 자기 일을 대신 해줄 수 있다는 기대는 애당초 해 본적이 없대요.”
“P에게 자기 관리는 생존을 위한 규칙이었네.”
“고등학교 졸업하면 독립해야 한다고 스스로 결심하고 또 그 결심 때문에 무척 부지런하게 살았나 봐요. 실제로 대학 다니면서 집을 나와 혼자 살기 시작했대요. 자기가 벌어서 공부하고 먹고 살려니 밤에 친구들 만나서 시간 보내는 건 생각도 못했겠죠. 허투루 돈 쓰는 것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에겐 평범한 일상도 도무지 익숙하지 않은 거죠.”
“짠하네요. 그 나이에 저는 철모르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는데 P 선배는 자신이 아빠고 엄마였던 거잖아요.”
다들 그 말에 공감했다.

삶이 남겨준 나이테
나는 P가 살아온 이야기를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우연히 알게 됐다. 나는 가끔 P를 집으로 초대했고, P의 밑반찬을 챙기기도 했다. 이런 관계가 사무실에서도 슬쩍 비쳐져 직원들 중에는 은근히 과장이 P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편애한다는 이야기가 돌기까지 했다.
P는 직장을 다니면서 시간을 내어 제빵학원에도 다녔다. 혹시 직장을 그만두면 빵가게라도 낼 생각에 미리 대비를 하는 셈이었다. 그렇게 이중 삼중으로 보험을 들어두는 버릇은 삶이 그에게 남겨준 나이테 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오늘처럼 회식 자리조차 안절부절 못하고 결국 일찍 자리를 뜨는 걸 보면 마음이 아픈 건 사실이다.
“자, 갈 사람은 가더라도 남은 사람은 즐겁게 먹자고.”
분위기를 바꾸려고 내가 말했다.
“그래도 P가 취직은 참 잘했어요. 여기 와서 형님 한 분 더 얻었다고 좋아하던 걸요.”
새로 얻은 형님이란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 녀석, 은근히 빨라. 줄서기가 동물적 감각 수준이야! 안 그래?”
“맞아요, 그런 거 같아요.”
농담으로 한 말이었으나 뼈가 없지 않았다.
편애라고? 맞다. 나는 P를 편애한다. 나를 유난히 편애해 주시던 중학교 때의 담임선생님처럼 나도 누군가를 특별하게 사랑한다. 엄마 없이 자라는 제자가 안쓰러우셨던 선생님은 나를 유난히 아껴주셨다. 자취하시던 선생님은 삼겹살을 굽는 날엔 자주 부르셨고, 가끔 우리 집 문밖에 서서 본가에서 보내준 밑반찬을 손에 들려주기도 하셨다.
“다른 아이들이 선생님이 저를 편애하신대요” 했더니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똑같이 사랑하니? 살아온 길이 다르고, 받은 상처가 다른 걸. 따로따로 편애해야지. 누군가는 이렇게 사랑하고, 또 누군가는 저렇게 사랑해야지. 더 많이 사랑할 사람이 있고, 좀 덜 마음을 주어도 될 아이가 있지.”(박규숙 선생님의 시 ‘지독하게 편애하기’에서 인용함)
그러니 이건 그냥 P를 대하는 나의 방식일 뿐이다.

박명철 기자
자서전 집필 강사로 활동하고 있고, 아름다운동행 자서전 쓰기학교의 주강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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