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1년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던 리스트가 우연히 피아노 위에 있는 낯선 악보를 발견하고 자기방식대로 연주를 합니다. 그때 한 남자가 다가와 “당신은 내가 작곡한 의도와 전혀 다르게 연주하고 있소. 그렇게 연주하면 나의 피아노곡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게 됩니다”라고 정색하며 말합니다. 이 사람은 쇼팽이었습니다. 자존심에 상처받은 리스트는 쇼팽에게 연주를 해보라고 요구했고 쇼팽이 연주를 시작하자 표현 못 할 묘한 음색에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쇼팽에게 정중히 사과한 리스트는 이후 쇼팽에게 한 집에 거하면서 서로 음악적 교류를 갖자고 제안합니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소중한 음악적 벗이 됩니다.
그러나 현란한 기교와 화려한 음색을 선호하던 당시 음악계에서 쇼팽은 리스트와 달리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쇼팽은 점차 침울해가고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연주자의 길을 포기할 위기까지 이릅니다.
그 결심을 리스트에게 전하자 리스트는 쇼팽에게 ‘마지막 연주회’를 제안합니다. 얼마 후 리스트는 자기 연주회를 찾아온 관객에게 인사한 후 모든 불을 소등(消燈)하고 어둠속에서 연주를 시작합니다. 연주가 시작되자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선율에 객석에서는 찬란한 경탄이 피어납니다. 연주가 끝나고 무대에 불이 다시 켜졌을 때 모든 관객은 놀랍니다.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연주자가 리스트가 아닌 자신들이 멸시하던 쇼팽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좌절한 쇼팽의 진가를 알리기 위해 리스트가 배려한 특별한 연주회였던 것입니다. 관객들은 자신들이 쇼팽에 대해 무지했단 사실을 시인하고 뜨거운 갈채를 보냅니다. 이후 쇼팽의 피아노곡들은 귀족들조차 가장 듣고 싶어 하는 곡이 됩니다.
만약 쇼팽이 리스트를 질투하며 괴로워하다 자기의 음악세계를 스스로 파괴했다면, 그래서 리스트가 배려한 그 ‘특별한 연주회’를 거절했다면 그 날 연출된 음악사의 기적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괴테는 “질투는 천개의 눈을 가진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까지도”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질투에 갇혀 곁에 있는 어떤 아름다움도 발견 못하는 맹목(盲目)을 삽니다. 장미를 보면서도 ‘가시’만 보고 불평합니다. 질투의 위험을 알았던 단테는 <신곡> 연옥편 제13곡에서, 질투의 눈길로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한 사람들이 ‘눈꺼풀에 구멍이 뚫리고 철사로 꿰매진 채 사는 고통’으로 묘사합니다. 질투는 마치 아직 마르지 않은 ‘젖은 옷을 입고 추운 밖을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질투는 시기하는 대상을 힘들게 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고통스럽게 합니다. 사실 질투는 자신이 지닌 ‘열등감의 교묘한 위장(僞裝)’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질투가 자신을 격동할 때는 “질투하는 이들은 남들이 살찔 때 자신만 마른다”는 고대 로마 정치가 호라티우스의 문구를 읽으며 마음을 다독거립니다.
그대여, 다가오는 3월의 봄을 ‘질투 없는 맑음’으로 맞이하면 어떨까요? 그것이 봄을 맞이하는 ‘정중한 예의’일 것입니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읽기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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