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기면 숨길수록 더 도드라지기 때문일까, 얼마 전부터 처제에게서 뭔가 의심스러운 구석이 보였다. 처제는 학교 직원으로 일한다. 학창시절에나 지금도 처제에게 학교는 마치 단편 소설 <회색 인간>의 배경이 되는 지저(地底) 세계로 보였다.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가 말한 것처럼 학교를 감옥처럼 느끼는지도 모른다. 지상(地上) 세계와 구분되는 지저 세계에 납치된 사람들은 지저 사람들을 위해서 죽을 때까지 곡괭이로 땅을 파야 했는데, 학교를 오가는 처제의 우울한 얼굴을 보면 지저 세계에 사는 회색 인간같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실제로 처제는 월요일 아침에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학교로 향했고, 금요일 저녁에는 한숨을 겨우 돌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처제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급식은 맛이 없다고 투덜거렸고, 복사기는 틈만 나면 종이를 씹는다고 짜증냈지만 학교생활이 한결 편안해진 듯했다. 헐벗은 채로 다녀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지쳤던 ‘회색 인간’들이 노래를 부르는 한 여인에게서 일말의 희망을 발견했던 것처럼 처제는 하루하루 작은 의미라도 채굴하려는 듯 부엌일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평일에는 시장을 돌며 장을 보고, 집에 돌아와서는 책을 읽으며 요리를 공부했다. 주말이나 연휴에는 채식 요리와 발효법 등을 배운다며 제주도나 일본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처제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회색 인간>을 쓴 김동식 작가에게서 어렴풋이 대답을 찾을 수 있었다.
김동식 작가는 액세서리 공장에서 아연을 녹여 붓는 노동일을 하며 머릿속으로는 기발한 이야기를 녹여냈다. 단순 반복하는 작업이라서 온갖 잡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게 글을 쓰게 된 계기라고 했다. 정규 교육은 중학교까지,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로 통과한 그는 책을 읽은 경험이라고 해봐야 남들 다 보는 <드래곤 볼>이나 <슬램덩크> 같은 만화책 정도가 다였다. 평범한 직장인인데 사실은 유명 드라마 작가이기도 하고, 시장거리 어머니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인데 사실은 유명 소설가이기도 한 사람들처럼 김동식 작가는 글을 쓰면서 또 다른 세상을 사는 재미를 느끼고 있었나보다. 그 기분은 로또에 당첨되었지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회사 생활을 그대로 이어가는 거랑 비슷하지 않을까. 평소라면 불편하고 기분 나쁠 일도 ‘쿨하게’ 넘어가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어쩌면 처제도 그 길에 들어선 것이리라.
<회색 인간>에서 끊임없이 던져지는 질문은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이다. 인간은 자기 이익과 자기 보존을 우선하면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간절함에는 무감각해진다. 이를 극복하고 인간을 인간으로 인지하며 스스로도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나를, 그리고 다른 사람을 실제로 느끼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김동식 작가에게는 그 과정이 글쓰기였고 처제에게는 그 과정이 요리였던 것이다.
처제는 오늘도 특별해 보이는 반찬을 하나 내놓기로 마음먹은 듯 부엌 선반에 온갖 도구를 다 꺼내 놓고 부산을 떨고 있다.
‘그렇구나! 처제는 이렇게 인간이 되기로 한 것이구나. 한 끼 밥이라도 인간처럼 먹기로 결심한 것이구나.’
슬쩍 둘러보니 내일부터 처제는 정성스레 도시락을 싸서 출근할 모양이다.

<회색 인간>, 김동식 지음, 요다, 2017년, 356쪽, 13000원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전에는 디자인하우스에서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스포일러 성격의 리뷰 글보다는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해져서 일부러 책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자는 무모한 목표를 설정하고 연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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