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주일. 눈이 올 것 같은 하늘이었다. 쪽빛 바다와 숨바꼭질하듯 꼬부랑길을 달려 도착한 곳, 남해의 한 시골교회다. 교회마당에 참새 두 마리가 총총 뛰어 다녔고, 십자가 종탑엔 갈매기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예배당 문을 빼꼼 열고 들어서는데 나도 모르게 “와”하는 소리가 나왔다. 기다랗게 이어진 창문 너머로 동화 같은 바다가 보였기 때문이다.
난로의 열기가 달려온 발걸음을 위로하듯 따뜻했다. 예배당엔 예닐곱쯤 되어 보이는 성도들이 앉아 있었다. 종소리가 울리자 예배가 시작되었다.
오르간 소리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영혼이 고요함으로 채색되었다. 침묵과 여백. 영혼을 돌아봄. 공동 기도문. 하나님 찬미. 마치 수도원에서 드리는 예배 같았다. 나에게 노래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우리 영혼 깊은데서 하늘 곡조가 흘러나오기를,
험한 길 가는 동안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화 누리기를,
그 사랑의 물결이 우리 영혼을 덮으시기를,
하늘의 평화가 교회와 영혼, 삶을 감싸주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언어유희 같지만 위로는 위로부터 오는 거라고, 누군가를 찾아가 노래하는 일이 위로를 전하는 일이라기보다는, 함께 위로부터 오는 위로를 당하는 일이라고.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노래를 이어갔다.

기쁘나 슬프나 오직 한 맘 주 위해
한 평생 주만 모시고 찬송하며 살리라
주는 나의 큰 능력 주는 나의 큰 소망
내가 항상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식사시간이 되었다. 둥글게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점심메뉴는 카레덮밥. 맛있는 시간이 이어지던 중 목사님이 가볍게 한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한 마디가 내 마음에 ‘쿵!’하고 떨어졌다.
“앞에 어르신은요, 집사님 찬양을 못 들었어요! 6·25 한국전쟁 참전 때 대포를 쏘셨는데, 그 때 고막이 찢어져 소리를 거의 못 들으시거든요.”
세상에! 6·25가 언제 적 얘긴데, 그렇다면 그 후로부터 67년 동안? 전쟁으로 귀가 멀었을 때 심정은 어떠셨을까? 숱한 세월 어떻게 살아오셨을까? 짐작도 되지 않는 구구절절한 사연들은 얼마나 많으실까…. 예배도, 설교도 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실 텐데 이렇게 예배당에 나와 예배를 드리시다니….
이 세상에 헤아리지 못할 슬픔이 얼마나 많을까. 그런 슬픔들이 세상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누웠는데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살아오시면서 사람들의 행동을 말로 삼으셨을까? 나의 노래는 소리를 지나 영혼에게 가 닿았을까?

“할아버지! 당신은 오늘 저에게 예수님이셨어요. 당신의 슬픔은 당신이 다 알지 못할 하나님의 귀한 도구가 되었을 거예요. 오늘 제가 그 먼 곳까지 달려간 이유가 어쩌면 할아버지를 통해 제 노래의 민낯을 보게 함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제 노래가 할아버지를 비껴갔으니 말이지요. 지난날 제 노래들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요? 누군가의 마음에 고운 씨앗으로 뿌려지긴 했을까요? 누군가의 슬픔을 토닥여 주기는 했을까요? 사랑 없이 노래한 날들…. 그런 날에 불렀던 노래들은 길을 잃지는 않았을까요? 아름다운 소리보다 아름다운 영혼이 우선이 아닐런지요? 소리를 잃어 노래를 못하게 될지라도 아름다운 영혼이어서 노래가 되는 삶. 그것이 참다운 영혼의 노래 아닐까요? 소리보다는 영혼, 볼륨보다는 울림. 제 노래 속엔 아름다운 영혼이 살고 있을까요? 그 아름다움의 이유가 성경 속으로 난 길을 걷는 순례자이기 때문일까요? 할아버지! 당신은 오늘 저에게 예수님이십니다.”

박보영
찬양사역자. ‘좋은날풍경’이란 노래마당을 펼치고 있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콘서트라도 기꺼이 여는 그의 이야기들은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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