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를 보면 트로이 전쟁의 발단은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그리스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를 유혹하여 트로이로 데리고 간 것에 있습니다. 분노한 메넬라오스는 미케네의 왕이었던 아가멤논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고, 아가멤논은 그리스 연합군을 소집해 트로이 정벌을 준비합니다.
당시 그리스연맹체는 한 국가가 전쟁의 어려움을 당할 때 군사동맹에 의해서 의무적으로 참전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가멤논이 그리스연맹에 소집령을 내렸을 때 이타케 왕이었던 오디세우스는 1년 전에 결혼한 페넬로페와 갓 낳은 아들 텔레마코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 행복을 좀 더 누리고 싶었던 오디세우스는 그 소집령에 임하지 않습니다.
트로이와의 전쟁에서 이기려면 탁월한 지략가 오디세우스가 절대로 필요했던 아가멤논은 이타케 섬을 찾아갑니다. 얼마 후 이타케 섬에 도착한 아가멤논은 벌거벗은 몸으로 당나귀와 황소를 한 데 묶어 쟁기질하고 밭이 아닌 해변에 씨앗 대신 소금을 뿌리고 있는 오디세우스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트로이 전쟁의 참전을 회피하기 위한 오디세우스의 연출이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미쳤다고 생각한 아가멤논이 돌아가려 하자, 오디세우스만큼 총명했던 팔라메데스가 오디세우스가 모는 쟁기 앞에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를 내려놓습니다. 놀란 오디세우스는 급히 황소와 당나귀를 멈추고,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쟁기를 높이 들어 올립니다. 결국 거짓연기가 발각된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후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이 전쟁에 참전하게 만든 팔라메데스를 증오하여 전쟁 중 살해합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이 담당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책임의 바깥에 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책임의 바깥’에 서있는 자를 ‘카코스(κακός)’, 곧 ‘부패한 자’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오디세우스의 지략은 칭송하면서도 존경은 표하지 않는 것은 그가 ‘책임 바깥’에 선 ‘카코스’였기 때문입니다.
사회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참 사랑의 네 요소’를 앎, 돌봄, 책임, 존경이라고 규정하며 그 가운데 ‘책임’을 핵심요소로 꼽았습니다.
그 ‘책임 바깥에 있는 사람’을 향해 그리스의 아이스퀼로스는 “지금 그대가 그 누구의 비극에 눈 감으면, 이후 그대가 다시 눈 떴을 때에 더 큰 비극을 쳐다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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