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익숙한 것부터 '바꾸기'-익숙한 거리 아니라 건강한 거리 선택해야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을 “나와 너 사이의 존재”라고 정의했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하면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는 중요한 전제가 ‘사이’라는 말이다. 사이는 공간이고 나와 너의 거리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요소들, 그러니까 소통이니, 감정의 공유니, 정체성의 확보 등이 모두 이 공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책 <디스턴스>(이동우 저/엘도라도)는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넷으로 분류한다. 친밀한 거리(intimate distance), 개인적 거리(personal distance),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 공적 거리(public distance)가 그것이다.
여기서 ‘개인적 거리’는 ‘사회적 거리’의 관계가 발전하여 확보할 수 있는 거리이다. 동시에 ‘개인적 거리’의 관계는 ‘친밀한 거리’를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 마르틴 부버의 정의에 따르면 좋은 관계란 이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거리는 상호 자유로움을 확보해주는 최소한의 안전지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친밀한 거리’보다 조금 먼 ‘개인적 거리’는 친구 또는 가깝게 아는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유지하는 거리인데, 사람들은 이 거리가 만들어주는 공간에서 자신을 방어함으로써 안전함을 느낀다.

개인적 거리는 물리적으로는 어느 정도일까? 지은이는 ‘1미터’라고 보았다. 가족 또는 연인이나 ‘절친’이 아니면 다가설 수 없는 거리이다. 동물이 적으로부터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치명적인 거리’가 있다면 사람에게도 ‘접근 금지 거리’가 있다.
왜? 몇 가지 근거들을 대는데 고대 군인들의 방패 크기가 1미터였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전투에서 최소한 1미터 정도의 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절대공간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복싱 경기에서 선수들이 잽을 날리며 거리를 재다가 맞다 싶으면 강력한 공격 펀치를 날리는데, 이 공격에 적절한 거리가 약 1미터라는 것과도 유사하다.
부부 사이나 절친, 연인 사이에도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자칫 찰떡처럼 딱 달라붙어야만 ‘찰떡궁합’이라 착각한다. ‘일심동체’란 말도 그런 착각을 부추긴다. 성경도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말함으로써 ‘일심동체’를 지지한다.
문제는 이 ‘일심동체’의 거리가 ‘0’인가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지은이는 어느 치약 회사가 “숨결이 닿는 거리 46cm”를 상품명으로 붙인 이야기를 하면서 친밀한 거리라도 물리적으로 측정하면 ‘46cm’의 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거리가 확보되지 않으면 호흡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로써.
‘가정 같은 교회’를 목회의 슬로건으로 삼는 분들이 많다. 래리 크랩은 <영혼을 세우는 관계의 공동체>(IVP)에서 교회는 ‘영적 공동체’이므로 마땅히 ‘친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여기서 ‘친밀함’을 근거로 상대에게 지나친 ‘오픈’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먼저 그가 자신의 깊은 곳을 열어도 된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실제로 누군가의 깊은 내면을 보게 될 경우, 영적 공동체는 그것을 훼손하거나 상하지 않게 잘 관리하고 보존해야 할 책임이 생긴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우리는 누군가의 ‘깊은 이야기’를 안다는 사실을 오히려 두려워해야 한다. 가족과 같은 교회 공동체는 이처럼 엄청난 책임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본회퍼는 <신도의 공동생활>(대한기독교서회)에서 ‘홀로 있음’을 말한다. 홀로 있음은 하나님 앞에 선 고독한 존재라는 의미이며, 이 자리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개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자리이며 “그 앞에서 고요하게 되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영적 공동체인 교회는 바로 이 홀로 있음을 통해 존속된다는 게 본회퍼의 주장이다. 왜냐면 “서로 함께하는 우리 공동체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공동체와 홀로 있음의 공존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귐 안에 서 있을 때만 우리는 홀로 있을 수 있고, 또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사귐 안에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 그것이 가정과 같은 모습이든 영적 공동체이든 ‘온전한 하나 됨’을 최선으로 추구하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러면서도 지켜야 할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며, 하나님을 갈구하는 고독의 공간 ‘46cm’가 확보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박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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