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제자가 스승에게 “세상의 흐트러진 삶을 올곧게 정돈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라고 묻자 그 스승은 짧은 어조로 ‘정명’(正名)이라는 답을 주었다. ‘정명’이란 ‘이름을 바르게 하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름을 이름답게’ 바로 세워야 세상과 삶이 가지런히 정돈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사회로부터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 이름에 맞게 살도록’ 은연중 강요받고 산다. 즉, ‘이름대로 살라는 것’이다. 그것이 ‘정명(正名)의 삶’이다.
세상이 이렇게 혼돈과 혼란으로 채워진 것은 ‘이름대로’ 사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는 사람이 다수(多數)를 차지해서일 것이다. 어른이 ‘어른이란 이름대로’ 살았으면 우리 아이들이 좀 더 세상을 희망찬 밝은 눈으로 볼 수 있었을 것이며, 부모가 ‘부모라는 이름대로만’ 살아주었으면 이 시대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가정의 붕괴가 지금보다 훨씬 감소되었을 것이다. 또한 의사가, 교사가, 정치인이, 기업인이 자신에게 주어진 ‘그 이름만큼만’ 살아주었으면 이 세상의 한숨은 분명 반감(半減)되었을 것이다.

고대 로마 최고 권력자 카이사르의 귀에 그의 아내 폼페이아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물론 후에 그 소문이 거짓임이 밝혀지지만 카이사르는 그 아내와 이혼한다. 놀란 신하가 그 이유를 묻자 “카이사르의 아내는 의심조차도 받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다. 카이사르가 절대 권력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결벽에 가까울 만큼 이름을 지키려 했던 것에 있었음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문득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에서 말한 “이 시대는 철학교수는 있어도 철학자는 없다”라는 말이 스쳐간다. 철학을 가르치는 철학교수는 주위에 많아도 ‘철학으로 사는 사람’이 드문 것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은 개인적으로 같은 책에서 말한 “갖고 싶은 것이 적을수록 많이 가진 자이다”라는 말과 더불어 늘 가까이에 두고 되새김하는 말이다. 씹을수록 더욱 ‘단맛’을 내는 ‘칡의 맛’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짙게 어두워진 이 세상의 조도(照度)를 조금이라도 높이려면 그 첫 시작은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부터 찾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이름표를 왼쪽가슴 상단에 부착해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말이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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