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새로운 한류 ‘윤동주 바람’ 만드는 성공회 유시경 신부

대한성공회 교무원장인 유시경 신부는 지난 2007년부터 윤동주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목숨을 잃은 매년 2월에 일본에서 기념집회를 열어왔다.
윤동주의 기일이 있는 2월, 동주가 유학한 도쿄 릿쿄 대학에서, 윤동주의 시와 삶을 사랑하고 기리는 일본인과 재일 한국인들이 함께하는 모임이었다.
특히 윤동주 탄생 100돌을 맞는 올해는 그의 또 다른 모교인 연세대 학생과 교수까지 더해 500여 명의 참석자들이 함께한 가운데 11월 23일 릿쿄 대학 강당과 공연장 등에서 성대한 기념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유시경 신부는 물론 이 행사를 준비하고 치르는 사람들의 중심에 서 있었다. 행사를 마치고 아직 감동이 사라지지 않은 시각, 릿쿄 대학이 가까운 도쿄 이케부구로 역 앞의 한 카페에서 그와 만났다. 그가 ‘동주 탄생 100돌’의 의미와 일본에서 만난 ‘동주 사랑’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1999년 일본성공회를 통해 릿쿄 대학의 교목으로 사역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어요. 서른일곱이라는 나이에 낯선 땅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게 부담이었으나 새로운 삶을 기대하며 요청을 받아들였지요. 돌아보니 좋은 추억과 교훈을 얻기 위해 비싼 수업료를 치른 기간이었지요.”

지금은 한일 양국의 관계가 매우 불편하게 되었는데요.
“당시에는 2002년 한일월드컵 공동 개최와 2004년에 드라마 <겨울연가>로 불었던 ‘후유소나 붐’이 더해지고 유학생 이수현 씨의 ‘살신성인 이야기’까지 더해서 그야말로 일본에서는 한국 붐이 일어났어요. 저도 릿쿄 대학은 물론 성공회신학원과 릿쿄 여학원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어강좌를 운영하면서 그야말로 ‘욘사마’ 열기의 세례를 받았지요.”

윤동주를 깊게 만나기 시작한 건 한국이 아니라 일본, 그것도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들로부터였다고 들었습니다.
“릿쿄 대학에 부임했을 때 그곳이 윤동주의 모교란 사실이 무엇보다 제게는 마음에 걸렸어요. 한국인들에게는 ‘서시’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윤동주 시인의 존재가 정작 그의 모교인 릿쿄 대학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묻혀 있었거든요. 그 가운데 일본에서 윤동주의 시와 삶을 만나고 연구하며, 그를 잊고 살아가는 일본의 오늘을 안타까워하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먼저 저를 찾아왔죠. 그중 한 사람이 릿쿄 출신으로 일본에서 윤동주 기념사업을 전개하고 있던 야나기하라 야스코 씨입니다.
그가 한국인으로 릿쿄 대학의 교목 생활을 하고 있던 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릿쿄 대학이 윤동주에게 냉담해서 야속하니 한국인인 당신이 교직원으로서 이 문제를 다뤄달라는 것이었죠. 알고 보니 야스코 씨의 안타까운 심정과 달리 릿쿄 대학의 경우 윤동주의 기일인 2월 16일이 이 학교의 입학시험 시즌과 겹쳐서 본의 아니게 냉담과 외면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었어요. 그 기간엔 시험의 공정성을 위해 외부인들의 출입을 제한하기 때문에 다른 행사를 허락해줄 수 없었던 거죠.
저는 이때부터 대학 관계자들에게 윤동주를 설명하기 시작했어요. 여러 차례 대화하고 보고하고 기획하면서 릿쿄에서 윤동주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어요.”

아, 그래서 기일이 아닌 2월 말경에 행사를 치렀군요. 2007년 첫 행사를 치를 때는 그 감격이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릿쿄에 입학한 때로부터 따지면 60년이 넘어서 처음으로 모교에 시인의 이름이 불려진 셈이죠. 강당이나 대교실 같은 넓은 장소가 아니라 유서 깊은 릿쿄의 채플에서 추도식을 거행했는데, 그건 그리스도인 윤동주가 재학 중 틀림없이 그곳에 있었다는 확신 때문이었어요. 채플 어딘가에 앉아 때로는 무릎을 꿇고 자신의 인생과 조국을 위해 기도했으리라 생각하니 울컥했죠. 게다가 당시에는 영화 <동주>에 등장하는 영문과 교수 타카마츠 타카하루 씨가 성공회 신부로 릿쿄의 교목 생활을 하고 있을 때니까요. 우리는 2008년 2월에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회’를 발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에는 윤동주의 고향 방문 모임이 생기고 후쿠오카에서는 시를 읽는 모임도 만들었어요. 교토 도시샤 대학에선 시비가 건립되었죠.”

일본인으로 윤동주 시인을 사랑하고 연구하는 분들을 좀 소개해주시면….
“말씀드린 수필가 야나기하라 야스코 씨가 있고, ‘관동대지진의 국가 책임을 묻는 시민모임’ 대표 야마다 쇼지 릿쿄 대학 교수, 수년 동안 윤동주에 대한 심문 내용과 재판기록을 찾아 필사해서 알린 우치고 츠요시 씨, 윤동주 시 전집을 번역한 이부키 고 선생, 윤동주의 고향을 방문하여 무덤을 찾아낸 오오무라 마스오 와세다 대학 교수, 윤동주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수필로 써서 교과서에 실릴 수 있도록 한 이바라키 노리코 수필가 등이 있어요.
이분들이 1980년대부터 이 일을 해오셨어요.
그리고 전 NHK 피디로 KBS와 함께 윤동주 다큐멘터리를 공동 제작한 타고 키치로 작가, 신문으로 적극 홍보해 준 사쿠라이 이즈미 <아사히> 기자 등이 소중한 동지들이에요. 아 윤동주의 희생과 삶 자체가 릿교 대학의 정신적 역사적 유산이라고 선언한 오오하시 히데이츠 전 릿쿄 대학 총장님도 빼놓을 수 없겠군요.”

윤동주의 탄생 100돌이 갖는 의미들을 정리해본다면….
“먼저 윤동주가 살던 공간을 주목해야 합니다. 간도에서 태어나, 조선의 평양과 경성에서 공부하고, 일본 교토와 도쿄에서 유학하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졌죠. 그의 이런 행보는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니라 강요당한 이주였어요. 간도 이주도 그러했고, 평양에서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학교가 폐교되는 바람에 더 이상 머물지 못했죠.
연희전문과 릿쿄에서도 그는 채 꿈을 펴보지 못한 채 희생되었어요.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세상이야말로 지옥이지요. 윤동주는 그런 나쁜 시대의 상징이면서, 우리는 다시는 그런 세상을 우리 다음세대에 물려주지 말아야 할 시대적 사명을 안고 사는 거예요.
제가 여기에다 하나 더 얹고 싶은 건 동주의 마음이 하나의 조선 곧 통일 조국을 상상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금 꿈꾸어야 할 조국이 동주의 조국인 셈이에요. 북간도에서 바라본 조선도, 도쿄에서 바라본 조선도 하나의 조선이었으니까요.
다행히 북한에서도 윤동주의 시가 읽힌다고 하니 그의 시는 남북을 넘는 민족의 재산이자 통일의 상징이 될 수 있지 싶어요.”

일본=박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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