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억한다는 것/지우고 싶은 기억을 뚜렷한 공간에 남겨

이 가을, 독일 방문 중 예기치 못한 한 장소가 기억에 남아 그 감동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특별한 설명 없이 도착한 베를린 시내. 국회의사당이 보이는 도심 복판에 콘크리트로 된 관모양이 줄지어 누워 있었다. 아무 표지도 없이 차갑고 낯설게 늘어선 대규모 시멘트 설치 미술은 적잖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유럽 대다수 도시들이 고색창연한 건물과 세련된 미적 감각의 조화를 추구하는데 비해 여긴 최대한 을씨년스럽게 ‘살해당한 유대인들을 위한 기념비’를 2천7백 여 개나 세워놓은 것이었다.
‘이 구조물에 앉는 것은 허용되나 올라서거나 뛰어다녀서는 안 된다’는 말을 공원 가장자리 콘크리트에 걸터앉아 들었는데, 사이를 가로 질러 들어서자 바닥이 움푹 파이며 콘크리트 직육면체들이 키를 훌쩍 넘어 미로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얼른 빠져나가고 싶던 칙칙한 콘크리트 숲의 기분은 쉽게 잊히지 않을 거 같다. 그곳은 가슴 절절한 공동묘지를 상징하고 있는 자리였다.

역사를 직시하는 용기
이 유대인 학살 추모 공원은 1988년에 독일 의회서 처음 공론화 된 후 1997년에야 공모전을 통해 디자인이 준비되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행을 앞두고 희생자 이름을 새기자는 등 기록의 의미와 예술적 시각에서 조율은 거듭되었고, 전쟁 60년이 지난 2005년이 되어서야 문을 열었다. 기획했을 당시 4백억 원에 해당하던 큰 비용과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지속적 첨언들이 일을 지연시킨 부분이 되었으리라.

이름 없는 수많은 콘크리트 추모비가 있는 그 지하에는 이들을 기억하는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었다. 살해당한 사람들의 이름과 남은 기록들을 전시한 엄숙한 공간이다. 희생당한 가족들을 한데 모아 놓은 사진들과 그들의 생애를 기록한 방이 있고, 거의 7백만 명에 가까운 유대인을 연대별로 얼마나, 어떻게 박해하고 살해했는지를 그래프와 통계로 보여주는 방, 그들의 일기와 편지 외에 마지막 순간에 쓴 안타까운 메모를 전시한 방이 있었다. 여기 자료를 통해 보면 1937년 무렵 유럽의 각지에서 유대인들의 희생이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알려진 ‘안네의 일기’가 특별한 것이 아니고 당시 상황의 한 부분임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었다. 또 다른 방에서는 동유럽을 비롯해 전 유럽에서 일어난 박해 현장 필름을 상영하며 포털 사이트와 데이터를 연계해 좀 더 정확히 널리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이 외에 추모공원과 전시관이 완성되기까지 논의하고 토론하던 과정도 상영하며 이런저런 영향을 준 사람들의 발언과 정신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이런 정직한 자세를 갖게 되었을까
동독 출신의 과학자인 메르켈 총리는 “과거에 눈 감은 자, 현재에도 눈멀게 된다”는 바이체크 전 대통령의 말을 인용하며 기독 민주당으로 의회에 진출했다. 목회자의 딸로 성장한 그녀는 “대다수의 독일인이 유대인 학살에 눈 감았고 그 희생자들을 도우려 하지 않았다”고 참회하며 6백만 명을 학살하기 위해서는 중앙 행정부의 계획에 ‘조직적인 협조’가 있어야 가능했음을 드러냈다. 그러므로 그 일을 기억하는 것은 독일인의 지속적인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메르켈 총리를 지지한 독일인들은 과거에 대해 할 수 있는 만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자세로 역사를 직시하며 베를린 시내에 이러한 유대인 추모 공원과 박물관을 만들었다. 메르켈이 총리로 재직하며 “오늘날 우리가 자유와 주권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과거사에 대해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모습은 기독교 신앙을 삶에 담은 의로움으로 빛나는 부분이다.
그들도 핑계를 대려면 그럴 수 있었다

중세 역사기록에 의하면 유럽에는 유대인을 싫어해 그들끼리만 살도록 규제한 ‘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ghetto)이 1516년 베니스에서 시작된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베니스에서 상권을 장악해가는 데 대한 반감이기도 했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1305년) 비텐베르크 성당 건너편에 유대인을 모욕하는 돼지 젖을 먹는 유대인 그림이 있는 것을 보면 반유대적인 정서가 유럽에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셰익스피어의 소설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 대한 언급을 보면 얼마나 지독한 사람으로 그려져 있는지. 높은 벽으로 둘러쌓아 유대인을 격리한 게토, 그러한 도시 베니스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의 유대인 샤일록의 모습이 이제 이해되는 시점이다.

유럽인이 지녔던 반유대감정
이후 이런 정서는 유럽 여러 도시로 확산되어 게토로 지정된 곳이 1천여 곳에 이르게 되었다니, 독일나치가 그 유대인들을 학살할 때 유럽인들의 그런 정서에 부응한 것이라 하며 그들의 협조 하에 가능했다고 핑계를 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후대 독일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죄하며 회개는 이런 거라고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때에 독일을 방문해 기독교 신앙이 양심적인 정신으로 이어진 베를린의 도심을 걸으며 진한 깨달음이 전해져 왔다.

전쟁의 또 다른 중심국, 일본
2차 세계대전을 불러온 독일과 비슷한 처지의 일본 생각이 났다. 자신들의 과거를 기억하고 풀어가려 애쓰는 독일과 가능한 한 숨기고 합리화하려는 일본, 이 두 나라 간에는 무엇이 이렇게 상반된 모습을 갖게 하는 걸까. 일본의 군국주의 시절 조선인 강제 연행과 군 위안부, 사할린과 시베리아 억류 노동자에 대한 증거들이 속속 나오고 있는 시점에도 고개를 돌려 은폐하려는 일본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가 왜 이토록 어려운 걸까.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 가진 단어, ‘회개’와 ‘양심’을 멀리 하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의 죄를 돌아보는 것, 양심의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일이 일본인들에게 닫혀있는 것이 아닌지. 생을 위해 복을 비는 것에만 제한된 단순한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일본인 가운데에도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들은 입장을 달리 한다. 최근 EBS 국제다큐영화제 작품 중에 등장했던 기록작가 하야시 에이다이는 자국민들에게 ‘비국민’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일본인들이 감추려 한 행적들을 직접 사진과 취재 기록으로 남겨 6천점을 ‘일본 서남 한국 기독교회관’에 기증했다. 그는 일본인들의 만행을 ‘사죄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바쳐 진실을 알린다며 아리랑문고 57권의 책을 내고 지난 9월 숨을 거뒀다.
정직한 삶은 바른 정신과 신앙에서만 가능한 것임을 깨닫는 시간이다.

전영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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