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억한다는 것 / 표현적 글쓰기와 고통스런 기억의 치유

잊어버리는 게 맞다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혼, 상실, 폭행, 학대, 실패 등 심리적 외상을 경험하면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본능적 방어 중 하나는 무엇일까? 아마 기억하지 않고 잊고자 하는 노력일 것이다. 가장 많이 듣는 충고 중 하나도 ‘생각하면 가슴만 아프니 잊어버려라’일 것이다.

한여름 내내 태양을 업고 너만 생각했다.
이별도 간절한 기도임을 처음 알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잊어야 할까? -이해인
 

고통스런 외상의 기억을 억압한다는 것은 기억과 관계된 고통스런 감정들인 슬픔, 분노, 죄책감, 배반감, 우울함, 불안감, 두려움, 불안, 억울함, 혼동 등을 억압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감정은 라틴어로 ‘흐르다’라는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영어로도 감정(emotion)을 움직이는 에너지(E-motion)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물처럼 흐르는 에너지이기 때문에 안전히 흘려보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본능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그러한 감정들을 무의식 깊은 곳에 억압하고 기억하지 않는다.
텍사스대학의 페니베이커 박사를 비롯한 여러 심리학자들은 수많은 실험과 연구를 통해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거나 처리하지 않은 채 억압하는 적극적인 억제활동은 신체에 스트레스를 축적하고, 스트레스는 면역체계에 영향을 주어서 정서적, 심리적 문제 뿐 아니라 육체적 질병까지 가져온다는 것을 증명했다.
심리학자 웨그너 교수의 말대로 고통스런 생각을 “멈추려는 생각을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억을 용기내어 직면하고 표현해야 한다. 상담사인 브래드쇼가 지적했듯이 “빠져나가는 유일한 방법은 통과하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특히 연구결과에 따르면 고통스런 사건과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뇌와 면역체계에 긍정적인 영향은 줌으로써 우리를 정서적으로 그리고 나아가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어떻게, 누구에게?
그렇다면 어떻게 누구에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우리들은 타인의 경험과 그것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어떤 판단도 없이 그대로 경청해주고 존중해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다. 누구나 고통을 호소했다가 공감받기 보다는 오히려 비난과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경청해주는 대신 판단하거나, 비난하거나 섣부르게 충고를 하려 한다. 듣는 사람의 충고나 지도는 흔히 비판적이어서 고통을 호소한 사람에게 더 큰 고통을 남겨준다. 그래서 시인 릴케도 “마음이여, 누구를 향해 호소할 것인가?”라고 한탄하고 있다.

여러 개의 언어를 알았으면 했지.
내가 나와 이야기를 나눌 때만 사용할,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내 심연의 언어와 알 수 없는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많은 낯선 말, 말들을. -마틴 발저


가끔 아무도 모르는 언어를 알고 싶던 적은 없었는가? 자신만 알 수 있는 언어로 실컷 안전하게 털어놓고 싶었던 적은 없었던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고 싶던 이발사처럼 아무도 모르는 곳에 대고 소리치고 싶은 적은 없었던가? 이때가 바로 저널(일기장)이 필요할 때이다. 말로 하는 호소보다 안전한 글쓰기로 표현하는 ‘저널 테라피’가 점점 더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 이유이다.

미국의 경우도 9⋅11사태나 허리케인이 휩쓸고 지나가는 재앙을 겪은 시민들의 고통스런 경험을 치료하기 위해서 심리치료사들은 ‘감정표현 글쓰기’를 적극 권하였다. “여러 고통스런 감정에 대한 기억을 억압하지 말고 토해내듯 맘껏 글로 표현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성찰하는 과정을 병행하라고 권한다. 언어로 심리적 외상의 경험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그 고통스런 사건과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다.

하지만 글쓰기가 ‘말’로 하는 표현보다 효과적인 것은 단순히 감정을 해방시키는 것 이상의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압도적이고 거대한 감정과 경험을 종이 위에 글로 쓸 때 그 문제들은 다룰 수 있는 작은 조각들로 변하게 된다. 더 나아가 글은 종이 위에 담겨져 있어서 내 감정과 생각을 거울로 보듯 객관화해서 바라보게 되며, 그 문제에 대한 통찰과 새로운 관점을 갖도록 이끌어준다. 새로운 관점은 우리의 기억의 내용을 바꾸어주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을 돕는다.

도움이 되는 감정표현 글쓰기 기법
하지만 감정의 억압과 통제에 길들여진 우리들에게는 감정표현 글쓰기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저널치료사들은 여러 개의 기법들을 연구하여 권장하고 있다.
때로는 내 삶에 분명 문제가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의 부모님이나 양육자로부터 받은 여러 상처처럼 해결되지 못한 해묵은 문제가 내면에 잠재 되어 있을 때 그렇다. 
이런 경우 시나 문학작품이 도움이 된다. 문학작품 특히 시는 강렬한 연상을 통해 우리의 의식적, 무의식적 기억을 일깨워 표현하도록 돕는 촉매역할을 해준다. 또한 문학작품 속에서 나의 고통을 대변해주는 누군가를 만나게 됨으로써 나만 겪는 고통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은 큰 위로와 힘을 준다.
그래서 한 미국시인은 시의 힘이란 바로 우리가 어떤 외로운 길목에 서있든 “누군가는 먼저 그 곳을 지나갔고 그리고 살아남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삶은 불가항력적 한계상황, 알 수 없는 모순과 수수께끼, 그리고 아픔으로 가득 차 있다. 헨리 나우엔은 잊어버린 기억은 “잊힌 것이 아니라 대면할 수 없을 뿐이고 대면할 수 없으면 치료할 수 없다”고 말한다. “표현된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이성복 시인).
그러므로 지금 당장 작은 일기장 한 권을 사서 마음껏 속마음을 쏟아내 보라.

*모든 이들에게 글쓰기가 다 유용한 것은 아니다. 특히 어린 시절의 극심한 심리적 외상을 경험한 경우에는 치료자의 도움 없이 혼자서 글을 쓰는 것을 자제하기 바란다. 글을 쓰다가 너무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고 정신적 위기감을 느낄 때는 즉시 글쓰기를 멈추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을 권한다.

이봉희
나사렛대학교대학원 문학치료학과교수이며, 한국글쓰기문학치료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미국공인문학치료사, 미국공인저널치료사로 저서로는 <내 마음을 만지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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