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17.9.27 수 17:43
 
> 뉴스 > 특집/기획 > special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개신교회의 출발지 독일을 찾아
루터의 종교개혁 5백주년 즈음에
[214호] 2017년 10월 01일 (일) 전영혜 @
   
9월의 독일은 이미 가을로 성큼 들어서 비를 흩뿌리며 외투를 찾게 했다. ‘검은 숲’이라 불리는 빽빽한 침엽수 지형을 지나자 비옥한 들판이 펼쳐지며 윤택한 삶이 전해져왔다.
루터보다 1백 년 먼저 ‘바른 신앙’을 주창하다 화형당한 얀 후스, 분명 개혁의 불은 그때 당겨졌을 것이다. 시대가 무르익기 전 앞서 나간 그의 가르침, 그 스승의 죽음 앞에 당혹스러웠을 그의 제자들은 어찌되었을까. 프라하 광장에서 얀 후스에게 화형이 행해지던 날, 교황청 공의회는 얼마 전 교회개혁을 주장하다 죽은 영국의 위클리프의 유골까지 꺼내 태우고 재를 뿌리며 신앙에 반기를 드는 행위를 봉쇄하려는 제스처를 보였다.

작고 귀한 마을, 헤른 후트
얀 후스를 따르던 체코 보헤미안 제자들은 그 서슬 퍼런 이들의 감시를 피해 독일 북부 작은 마을에 정착해 경건한 신앙을 이어가게 된다. 헤른 후트. 그들은 얀 후스의 가르침대로 “진리를 사랑하며 진리를 말하며 진리를 행하는 삶”을 살며 ‘생명력 있는 신앙’을 위해 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무엇보다 그들이 매일 ‘세계 선교’를 위해 기도해왔다는 언덕 위 기도처는 특별한 감동이 전해지는 곳이었다. 온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그곳에서 그들은 종교개혁 이후 다시 기독교 신앙이 느슨해진 때 경건주의 신앙의 한 줄기를 세워가고 있었던 것이다. (크리스천 데이비드, 진젠 도르프)

‘토론해 봅시다’- 죄와 은혜에 관하여
루터가 벼락을 경험하며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들어간 후, 그는 자신을 일깨우기 위해 고행과 스스로 체벌하는 일을 서슴지 않으며 교리의 가르침에 매달려 살았다. 그러나 의문이 많아지고 평안을 얻지 못하자 담당 사제는 성서 연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안한다. 성서학박사를 공부한 루터는 그 자격으로 1517년, 신앙에 관한 공개적 논쟁을 할 수 있게 되어 95개 조항을 내걸게 된 것이다. 토론의 당사자로 지목된 터첼은 토론 대신 루터를 교회 당국에 고발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게 된 루터, 그런데 그의 성경적 주장은 오히려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쳐 개혁에 동참하게 한 결과를 가져왔다. (마르틴 부쳐, 멜랑 히턴)
교황청은 라이프치히에서 다시 기회를 줄 테니 권위에 순종하라고 권유하나 루터는 고해성사나 면죄부가 아닌 오직 믿음과 십자가 은혜로 의로워짐을 말한다. 이로써 루터는 사제 파문을 당하게 된다.

지금은 유명해진 비텐베르크
루터가 살던 당시 비텐베르크는 2천5백 명이 사는 작은 도시였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서적 출판 유통으로 유럽 정신사의 구심점으로 떠오르며,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루터는 교황청이 보낸 사제 파문 칙서를 비텐베르크대학 동료들 앞에서 불태워버린다. 그 칙서는 독일어로 번역되어 95개 반박문처럼 인쇄되어 퍼져나갔다.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의 한 사제가 시작한 항의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지며 영향력도 커가자 교황청은 루터를 불러들이는 한편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루터를 탄압할 것을 권했다. 이에 카를 황제는 루터의 주장을 직접 들어보자고 하며 보름스회의에 불러들였다. 막강한 권력의 교황청에 들어가는 일이나 일주일 걸리는 보름스까지 가는 것은 죽음을 뜻하는 것일 수 있었다. 이에 그 지역의 제후 프리드리히가 이것을 중재하며 나선다. 로마는 너무 멀어 갈 수 없고 보름스로 갈 테니 황제가 루터의 신변을 보호해 달라는 것이었다.
보름스에 모인 교황 지지자들과 카를 황제 앞에서 루터는 “내 양심은 하나님 앞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며 “성서가 나를 유죄로 인정하지 않는 한 어떤 주장도 철회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루터의 사람들
보름스회의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은 루터를 교황청과 황제는 죽이려 했다. 그것을 안 프리드리히 제후는 자신의 군대를 동원해 루터를 빼내어 바르트부르크성에 피신시킨다. 성 관리자 한 명 외에는 아무도 루터를 몰랐다니 프리드리히 제후가 루터의 생명 보존을 위해 얼마나 철저하게 도움을 주었는지 짐작이 간다. 거기서 10개월, 루터는 새 이름의 기사로 변장을 한 채 예배에만 참석하며 독일어로 신약 성경을 번역해낸다.
또 다른 루터의 사람으로는 루터의 사상을 그림으로 표현해 대중들에게 쉽게 이해하게 한 화가가 있다. 루커스 크라나흐. 그는 궁정 화가로서 시장으로 선출되기도 한 명망 있는 사람이다. 그는 홀로 계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리며 라틴어로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자신의 죄를 깨달으라고 써놓았고, 십계명을 그림으로 표현해 글을 모르는 사람도 천사와 악마가 삶 속에 공존함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루터가 번역한 신약성경을 자기 집에서 초판 인쇄도 해 준 귀한 사람이었다.

루터로 인해 달라진 기독교 테두리
지금 우리의 언어로 성경을 읽으며 예배하게 된 것은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 인쇄하여 보급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찬송가를 작사 작곡하여 예배 시간에 구성원 모두가 입을 열 수 있게 하였고, 다 같이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지침도 마련하였다. 성서 이해를 위해 누구나(여성 포함) 읽고 쓸 수 있도록 각 교회는 교육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 그 외에 사제의 결혼을 적법하게 하고 교회 안에 수많은 장식품등 도구가 사라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고해 성사 대신 누구나 직접 회개하고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의 루터의 명소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이 다 신앙의 발자취를 찾은 것인지 궁금했다.
“우린 독일의 역사 탐방을 하고 있어요. 종교개혁 5백주년이니까 비텐베르크에 왔고요.”
“8학년인데 학교에서 역사 기행 여행 중이에요. 기독교인이요? 한 4분의 1쯤 될 거예요.”
그 중에 웃으며 가까이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덴마크에서 왔다는 루터교 신자들이다. 여자 목사님과 밝은 그룹의 사람들이 역사 탐방객들과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의미 있는 여행을 하고 있어요. 당신들에게도 좋은 여행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얼굴 표정이 다르다고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독일 = 전영혜 기자
ⓒ 아름다운동행(http://www.iwithjesu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표지 보기
기른다는 것, 알아간다는 것
혈루증 앓았던 여인의 병명은?
“사랑하는 삶, 화폭에 곱게 담았...
업싸이클링 공방, 환경운동의 새로...
나의 구원 정작 ‘그들’로부터 왔...
“환경운동, 옷걸이대 하나로 시작...
삶이란 어려운 것이다
제발 아이들에게 놀이를 돌려주세요
DMZ 따라 기도하며 걸은 한희철...
그분만이 사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