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택시운전사>

아내가 죽은 뒤, 택시를 몰며 딸 하나를 키우는 홀아비 만섭(송강호)은 피터(토마스 크레취만)를 태우고 광주로 향합니다. 10만 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무작정 나선 길, 만섭은 손님인 피터가 누군지, 그리고 그가 왜 그곳에 가는지조차 모릅니다. 때는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고립된 채 군인들의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피터가 그런 광주 현장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노력하는 반면, 만섭은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거기서 벗어나려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현실을 외면하려 했던 만섭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해요.

광주로 데려간 것일까 이끈 것일까
잘 알려진 대로 <택시운전사>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취재해 전 세계에 알린 독일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를 광주까지 운전해줬던 택시기사에 관한 실화를 다룬 작품입니다. 영화 속에서 보면, 분명 만섭이 택시를 운전해 피터를 광주에 데려다줍니다. 하지만, 이건 충분히 역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실은 피터가 만섭을 광주로 이끈 거지요. 피터가 만섭 때문에 광주에 갈 수 있었던 게 아니라, 피터가 있었기에 만섭이 광주를 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현실을 외면하고 있던 만섭이 눈을 뜨게 된 거죠.
마찬가지로, 영화 <택시운전사>가 1980년 5월 광주를 꺼내 우리 국민과 관객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은 이 시대와 정의가 혹시 이 영화를 요구한 게 아닐까요? 세월호 비극을 관통하며, 그걸 어떻게 해서든지 덮고 외면하려던 이 시대의 민낯을 보면서, 오랫동안 끙끙 앓아왔던 5‧18 광주를 떠올렸다고 봅니다. 이 시대가 영화적 모티브가 된 거죠. 즉, 영화가 관객을 부른 것이 아니라, 관객이, 아니 국민이 <택시운전사>를 요청한 겁니다.
그래서 영화 속 광주 시민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세월호 희생자와 유족들로 오버랩되고, 폭력으로 입을 틀어막는 군부나 왜곡 보도를 일삼는 (당시 방송이 세월호 유족을 폄하하고 호도했던) 공권력과 언론으로 겹쳐지는 건 당연해 보입니다.
과거의 비극이 현대사에도 지속해서 반복되는 이 역사적 불행 고리를 이제는 끊어달라는 소망을 <택시운전사>에서 읽습니다. 광주 사람들은 피터와 만섭에게 부탁합니다. 여긴 걱정하지 말고 세상에 알려주기만 해달라고. 폭력적 현장을 마주한 자에게 증언자가 되어달라는 요구입니다. 이는 오롯이 관객에게도 요청되는 동일한 요구이기도 합니다. 즉, 광주의 택시기사 황태술(유해진)이, 그리고 광주의 대학생 구재식(류준열)이 하는 부탁은 만섭과 피터를 넘어, 우리에게도 쥐어집니다.

어떤 증인이 될 것인가
불의에 맞서 증인이 되는 것, 이것이 크리스천의 제자도가 아닐까요? 그런데 이 시대의 기득권자들과 (강자의 성공신화 논리에 젖어 들어) 그 곁에 있던 사람들은 꽤 오랫동안 그걸 외면하고 침묵하려 했습니다. 때론 정치적이지 않겠다고, 중도를 내세우기도 했어요. 그런데 강자와 약자가 싸우는데 중도를 취한다는 건 강자의 손을 들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균형을 유지한다며 사실과 거짓을 공평하게 전달하는 것 또한 거짓에 사실과 동등한 권위를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늘 고민해야 합니다. 어떤 증인이 될 것인가.

다시 영화 <택시운전사>로 돌아가겠습니다. 이 영화는 시대에 무지했던 보통사람 만섭이 성장하는, 그러면서 변화하는 이야기입니다. 2006년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가톨릭 신부는 사형수에게 “물고기가 사람이 되는 건 기적이 아니라 마술이고, 사람이 변하는 게 기적이지”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섭의 변화는 기적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변화한다면, 그것 또한 기적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의의 길로 방향을 바꿔나가며 제자가 되어 간다는 것, 바로 매 순간 기적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임택
대학에서 영화학과 미학을 강의하며, 철학과 인문학을 통해 영화를 독해하고, 시대와 소통하는 방법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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