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되니? 그 인간, 이제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꺼내도 반대만 하려고 들어. 내가 그 동안 자기를 어떻게 대했는지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아. 새벽에 부부싸움 했다고 집을 나와서 전화했을 때도 자다가 뛰쳐나가서 밤새도록 말벗이 되어준 게 나야. 가을 상품 출시하느라 밤늦게까지 일할 때 우리 큰아이 아픈데도 사무실에 남아서 자기 일 도와준 것도 나야. 그것뿐이니? 인사고과점수가 필요하다고 해서 내가 아끼던 기획안도 넘겨주었잖아. 내가 이런 것까지 들먹이며 공치사를 해야 해? 사람을 왜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 거야?”
나의 문자는 속에 담아둔 말을 음식물 토하듯 게워냈다.
디자인실에서 함께 일하는 입사 동기 K 때문이다. 그녀와 나는 함께 입사했으나 올해 승진을 내가 먼저 하는 바람에 K는 나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 사이에 불편한 기운이 흐르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그 전까지 우리는 점심을 함께 먹는 가까운 친구였다.
그러나 친한 친구의 승진에 따른 포지션 변동이 불편했던지 K는 사사건건 나를 걸고넘어지려는 태세이다. 무엇보다 디자인실 네 개 팀이 신제품 선정을 위한 경쟁에 들어가 이번 경쟁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만 K의 승진도 가능하고, 내년 업무예산 편성에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나와 K가 함께 잘 협력하여 좋은 결과를 얻어내야만 우정도 회복할 수 있는 셈이다.

남편의 제안
“엠티를 한 번 다녀오지? 여수로….”
이런 내 형편을 이야기하자 남편이 대뜸 제안했다.
“여수에 가면 특별한 게 있나?”
“몽돌바닷가, 우리가 몇 년 전에 갔던…,”
“거긴 왜?”라고 다시 묻다가 깨달았다. 몽돌이라는 단어가 우리 부부에게는 ‘화해’의 상징이었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여수에서 작은 대안학교를 세워 운영하는 목사님의 초청을 받아 그곳에서 여름성경학교 교사로 며칠을 봉사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시어머니의 간섭이 힘들어서 화풀이를 남편에게 퍼부었고, 남편은 친구들을 집으로 편하게 데려오지 못하게 하는 나 때문에 불만이 많았고, 아이를 갖는 문제로도 언성이 높았다. 그러다가 내가 “이럴 거면 뭣 하러 결혼했어?” 하니 “그럼 그만두든지” 하고 남편이 되받았다. 그걸 끝으로 우리는 며칠 서먹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여름성경학교까지 와서도 이런 냉랭한 분위기는 이어졌다.
목사님은 이런 관계를 눈치 채셨던지 바닷가로 불러내어선 저녁상을 차려주셨다. 식사를 마친 뒤 바닷가로 데려가서 손수 준비한 커피를 종이컵에 따른 뒤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몽돌이 구르는 소리, 전에도 들어봤어?”
“네, 거제의 바다에도 몽돌이 많은 곳이 있어요.”
거제에서 나고 자란 남편이 대답했다.
“나는 이곳에 오면 몽돌 사진을 찍는 걸 좋아해. 이 돌을 가져갈 수가 없으니 사진이라도 찍어서 가져가는 거지.”
“몽돌이 좋으세요?”
내가 물었고, 목사님다운 짧은 설교가 이어졌다.
“동그랗잖아. 파도가 밀려오고 또 쓸려갈 때마다 몽돌이 구르는 소리를 들으면 마치 관현악단의 연주 같아. 나는 그 소리가 마치 서로를 다듬는 소리 같아. 이렇게 서로를 다듬으며 천년이 흐른 뒤에야 동그란 몽돌이 되거든. 그런데 신기하지? 모난 데를 깎는 소리는 돌을 깨는 소리여서 불협화음처럼 귀에 거슬릴 텐데 몽돌 바다의 소리는 어떤 화음보다 아름답거든. 아마도 평화에 이르는 소리여서 그렇지 싶어.”
몽돌이 구르는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목사님은 또 무슨 말씀을 계속했는데, 남편과 나는 거기까지 듣고 나서 목사님이 우리 부부를 몽돌 바다에 데려온 까닭을 충분히 감지했다. 큰 감동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며칠 동안 내 귀에서 몽돌 바다의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차르르 차르르….
꽤 시간이 흐른 뒤 아이들을 데리고 이번에는 거제의 몽돌 바다를 찾았을 때 남편이 말했다.
“그때 몽돌이 구르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어. 사람 살아가는 게 어찌 보면 몽돌 같을 것이라고. 그렇게 파도 속에 굴러가고 굴러오기를 반복하면서 자기를 다듬고 다른 사람을 다듬어 가는 것 아닐까. 못된 성품을 다듬기도 하고, 헛된 욕망을 깎기도 하고, 어설픈 기대도 어루만지는 것 같아.”

그렇게 깎이다 보면
부부만 그런 건 아니지 싶다. 그래, 몽돌 바다에 한 번 다녀오면 좋겠다. 무슨 큰 감동이야 있을까. 그래도 며칠 동안만이라도 귓가에 그 소리를 담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K도 나도 알게 되겠지. 세월과 세파에 휘몰아치고 깎이면서, 때로는 이해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는 시간의 한복판을 지나면 우리도 비로소 몽돌처럼 둥글고도 매끄러운 평화에 이를 수 있다는 걸.

박명철 기자
자서전 집필 강사로 활동하고 있고, 아름다운동행 자서전 쓰기학교의 주강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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