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산에서 일하면 따로 여행갈 필요가 없겠어요.”
나지막한 산자락에 위치하여 숲으로 둘러싸인 덕(?)에 보름산미술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내게 종종 이런 말을 건넸다. 미술관 주변 환경이 좋다는 말을 에둘러 칭찬하는 것이겠지만 일에 바빠서 지난 몇 년간 하루짜리 휴가조차 마음 편히 다녀오지 못한 나는 좀 억울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올해는 모든 일을 뒤로하고 과감하게 휴가 일정을 잡았다.
그런데 웬걸?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라는 노랫말을 무시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인지 노는 일이 힘들게 느껴졌다. 나는 흐리거나 비가 오면 안 좋은 날씨가 간만의 휴가를 망쳐 놓았다고 투덜거렸고, 햇볕이 화창하면 이런 날씨에 돌아다녔다가는 일사병에 걸릴 거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다녀온 휴가는 허연 맨살에 남겨진 수많은 모기의 흔적으로 씁쓸한 추억을 남겼다.
‘휴가를 즐긴다는 게 실은 만만치 않은 일이구나’ 하고 한숨을 쉬다가 손에 잡힌 책 <내 방 여행하는 법>. ‘세상에서 가장 값싸고 알찬 여행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데, 이거 딱 나를 위한 책이라는 감이 왔다. 저자인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가 금지된 결투를 벌였다가 42일간의 가택 연금형을 받았는데, 그 기간 중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자기만의 집 안 여행을 하며 쓴 글들이었다. 1796년에 나온 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독창적인 발상으로 여행이라는 개념에 접근하였다. 몇 평 안 되는 좁고 별것 없는 내 방 안에서도 여행이 가능하며, 진정한 여행은 새롭고 낯선 것을 ‘구경’하는 일이 아니라 ‘발견’함으로써 익숙하고 편안한 것을 새롭고 낯설게 보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 우리나라 옛 선비들 또한 글공부하다 지쳤을 때 잠깐 짬을 내어 산수화 족자 하나 벽에 걸어 놓고 혹은 화첩 한 권 서안(책상)에 펼쳐 놓고 한여름 초막에 앉아서도 부채질하며 그림 속 이상향을 찾아 유람을 떠나지 않았던가. 겸재 정선이 그린 ‘만폭동도’를 찾아보았다. 선비들이 시원한 금강산 폭포 아래 늘어서서 시를 읊고, 시는 이내 폭포 소리를 배경으로 청량한 음악이 되었다.

천 개의 바윗돌 다투어 빼어나고    
千巖競秀
만 줄기 계곡물 뒤질세라 내닫는데   
萬壑爭流
초목이 그 위를 덮고 우거지니      
艸木蒙籠上
구름이 일고 아지랑이 자욱하네     
若雲興霞蔚

여행도 일이 되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를 여행 전문 기자에게서 들은 적이 있고, 미술을 전공한 어느 지인은 작품 보기를 좋아하지만 미술관을 한 바퀴 돌면 금방 피곤해져서 잘 가지 않는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
그래, 맞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 책 한 권을 선비의 화첩마냥 옆에 끼고 삶에 지친 심신을 달래보리라. 혹여 지난여름에 열심히 일하고 가을 휴가를 계획하는 이들에게도 여행 중 ‘진정한 여유’를 선사하는 전통 그림 다이제스트이니, 배낭 혹은 트렁크 짐 목록의 맨 윗줄에 꼭 적어 놓으라고 망설임 없이 추천한다.

➊ <내 방 여행하는 법>,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지음, 장석훈 옮김, 유유 출판사, 2016년
➋ 겸재 정선, 만폭동도, 조선 18세기 중반, 비단에 수묵담채, 33.2×22cm, 서울대박물관
➌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 오주석 지음, 월간미술, 2009년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으며, 전에는 디자인하우스에서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스포일러 성격의 리뷰 글보다는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해져서 일부러 책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자는 무모한 목표를 설정하고 연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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