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아픔 기우며 따뜻한 연대 잇다

출발
“허리가 잘린 내 나라 강토, 그 아픔의 땅인 DMZ, 곧 비무장지대를 따라 걸어야지 했던 것은 오래 전부터 마음에 있던 생각이었다. 한 형제요 자매, 그럼에도 서로를 향해 불신과 증오의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곳, 그 아픔의 땅을 걷고 싶었다. 걸으며 기도하고 싶었다.”
한희철 목사(성지교회)가 유난히 덥고 폭우도 잦던 올 여름에 열하루 동안 비무장지대를 따라 “한 마리 벌레처럼” 꿈틀꿈틀 걸어야 했던 까닭은 그것이다.
그러나 ‘분단의 아픔’이란 꼭 남북한의 아픔만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세상의 모든 단절된 관계의 아픔까지 포함하여 그것을 기우고 엮으려는 바람을 담아 기도의 걸음을 결심한 셈이었다. 가령 목회의 길은 신뢰와 존중 없이는 걸을 수 없다고 믿었는데 언젠가부터 그 알맹이들이 하나둘 사라져버렸고, 자신이 살아온 세월 속에서 수없이 만나고 스쳐간 이들의 이름마저 희미해져버린 걸 깨달았다. 그는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질러 걸으며 걸음걸음 사라지거나 단절된 것들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기도할 작정이었다.
출발지점은 강원도 고성의 명파초등학교였다. 이 학교는 우리나라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그의 첫 기도는 “어서 통일이 되어 남과 북의 어린이들이 함께 어울려 마음껏 뛰노는 그 날이 오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성-인제-원통-양구-방산-화천-철원-연천-파주, 마침내 임진각에 이르기까지 380㎞를 걷는 일정이 시작되었다.

이 땅을 기우소서
“서로를 향해 겨누고 있는 온갖 총부리와 잘린 허리를 두르고 있는 철조망을 녹여 괭이와 호미와 보습을 만들 수 있다면, 수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산하 곳곳에 묻혀 있는 지뢰를 모두 파내고 그 자리에 곡식 씨앗을 심는다면 이 땅 어느 누구도 굶주리는 자 없을 텐데….”
그는 “철조망이 보일 때마다, 철조망에 매달린 역삼각형 지뢰 경고문을 만날 때마다, 군부대 앞을 지나갈 때마다, 훈련 중인 군인들과 굉음을 울리며 지나가는 탱크를 만날 때마다, 어디선가 총소리와 대포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기도했다.
폭우 속에서 땡볕 속에서, 기도를 할 때마다 더욱 간절해졌다. 내 땅을 내 발로 밟는 행동이 가져다준 기쁨 또한 컸다. “한 발 한 발을 내디디며 비로소 내 발이 내 땅에 닿는 마음이 들었다”고 그는 고백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의식하지 못한 채 허공을 살아온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먼 길을 달려와 하룻길을 동행한 선배 목사와 콩국수 한 그릇을 놓고 “우리의 걸음과 땀을 받으시고, 갈라진 이 땅을 기우소서!”라고 기도했다. 잊을 수 없는 기도였다. 갈라지고 상처나 너덜너덜해진 이 땅을 기울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땀과 눈물이 밴 기도, 그리고 그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의 은총뿐임을 마음을 다해 인정했다.

기도 ‘따뜻하고 든든한 연대’
한 목사는 또 아주 특별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며 만난 모든 사람들,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리며 드리는 기도였다.
“생각해 보니 그런 시간은 지금까지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까. 기도하는 중에 떠오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떠오르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하면 기도를 드리는 데 얼마만큼 시간이 필요할까.”
그야말로 흑백 영사기가 돌아가듯 생각지도 못한 얼굴들이 떠올랐다. 고향 교회 목사님들과 교회학교 선생님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군 생활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기억 창고에서 길어 올린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거기에는 기쁨과 그리움과 고마움과 반가움과 따뜻함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디에선 아픔과 상처로 얼룩진 시간 속의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만나고 기억하는 이들은 열흘 남짓 되는 기도의 시간에 담을 수 있는 수의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태어나 살아가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 기억 속에 담고 있는 사람들은 무한정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일정하게 제한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 그들이, 그들과의 만남이 내 인생인 까닭이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걸어가는 길, 그게 서로의 삶인 것이다. 무한정한 만남이 허락된 것이 아니라면 만남이 허락된 이들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살면 안 되는 것이었다.”
또 있다.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기도란 곧 따뜻한 기억과 든든한 연대”란 사실이었다. 즉, 서로를 따뜻하게 기억하는 것, 우리가 남이 아님을 확인하는 시간이 곧 기도인 것이다.

함께 짐을 진다는 것
돌산령터널은 한여름에도 한기가 돌아서 긴팔 옷을 챙겨 입어야 한다고 누군가 일러주었다. 이 터널은 한국전쟁 때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도솔산을 옆으로 끼고 해안과 양구를 잇는다.
터널 안은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 가장자리로 사람이 걸어갈 만한 통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도로보다 조금 높은 곳에 일정한 크기의 콘크리트 덮개가 이어져 있었고, 덮개는 걸을 때마다 덜커덩거렸다. 터널 길이만 3킬로미터에 달하므로 어른 걸음으로 가더라도 40분이 충분히 걸리는 거리이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이 터널을 홀로 걷자면 몸이 오싹해지게 마련이다. 그는 터널을 걷는 내내 어둠의 터널을 벗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를 생각했다.
그렇게 지루하고 먼 터널을 걷다보니 하얀 빛의 동그라미가 점점 크게 드러났다. 그런데 그때 터널 맞은편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환영을 본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른 아침에 누가 이 깊은 터널을 걸을까 싶었다. 만나면 걸음 멈추고 인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터널 안에서 “목사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울렸다. 깜짝 놀랐다. 모자를 쓴 사람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가까이 다가온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교회 장로님이었다. 말을 잃은 채 서 있는데 장로님은 그의 배낭을 벗겨 자신이 매고는 통로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출구 쪽으로 걸어가는 장로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엉엉 소리내 울고 싶었다. 터널 밖으로 나와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터널 밖에는 장로님의 부인 김 권사님이 차를 세워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권사님은 차에 챙겨온 먹을 것을 꺼내주셨고, 우리는 길가 바닥에 앉아 드문 만남이 주는 은총을 마음껏 누렸다. 그날은 장로님과 함께 걸었다. 장로님이 내 배낭을 종일 메고서 걸었고, 나는 장로님을 통해 짐을 함께 진다는 의미를 배웠다. 그것은 말로 하는 것도 아니고 안쓰럽게 바라보는 것도 아닌, 말 그대로 짐을 나누어지는 것, 함께 땀을 흘리는 것임을 배웠다.”

또 누군가 걸어가야 할 길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중년의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DMZ를 걷는다는 데 큰 관심을 보이면서 이것저것 물었다. 특히 나이를 묻고는 자신이 세 살 더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나이를 먹어 걷고 싶은 곳을 걷는 일과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을 했어요.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음에 둔 길이 있었는데 그 길을 꼭 걸어봐야겠네요.”

사람들이 걸음의 희망에 대해 물어올 때, 한희철 목사는 무엇보다 행복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다른 어느 곳보다 남과 북의 분단을 경험하며 걸어보기를 간곡하게 제안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오기를 기대합니다. 걷는 동안 마음을 채웠던 평화와 자유를 이제는 그 무엇에도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 ‘갈라진 이 땅 기우소서!’ 내내 드린 기도를 주님께서 응답해 주시기를 빕니다.”

* 웹진 ‘꽃자리’(http://fzari.com)에서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란 제목으로 연재되고 있다.

박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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