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속에서 찾아본 ‘공들임’

01 암울한 현실 바꾸려는 절박함
사도세자의 아들이면서 장차 정조가 될 세손의 나이가 스무 살이 되던 때였다. 팔순이던 영조는 왕위를 물려줄 생각으로 어느 날 세손을 향해 질문했다. 대신들이 함께 있는 자리였다.
“동궁은 노론 소론과 남인 북인을 아느냐? 나라의 일과 조정의 일을 아느냐? 병조판서에는 누가 좋을지, 이조판서에는 누가 좋을지를 아느냐?”
그러나 임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론의 대신 하나가 불쑥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동궁은 노론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판서 병조판서에 누가 좋을지를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욱 알 필요가 없나이다.”
이날 세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삼불필지(三不必知)’라는 말로 잘 알려진 이날의 풍경은 정조 즉위 당시 조정의 권력판도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영조의 오래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선은 소수 특권세력 노론의 세상이 구가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정조의 개혁이란 곧 이들 노론과의 싸움이어야 했고, 이 싸움에서 이기지 않고서는 조선의 미래는 캄캄했다. 정조에겐 아버지를 앗아가고 세상조차 어둠 속으로 몰아간 이 슬픈 현실을 어떻게든 바꾸어야겠다는 간절함이 너무 절박했다. 그래서 정조의 일거수일투족이란 그야말로 모든 공(功)을 들이는 일이어야 했다.

02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한다 ‘치곡’
영화 <역린>에서는 정조의 이런 간절함을 <예기> 중용 23장의 구절로써 풀어냈다.
“其次 致曲. 曲能有誠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唯天下至誠 爲能化.”
영화에선 다음과 같이 옮겼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한다’고 해석한 ‘치곡(致曲)’이란 단어에서 ‘곡(曲)’은 간절함이 하도 깊어 정성을 다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러니 간절함에서 성(誠) 곧 정성스러움이 배어나오고, 정성스러움이 끝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이다.
맞다, 간절함 없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하도 간절하여 정성스러우며, 정성스러워서 또렷해지고, 드러나고, 밝아지고, 감동을 주고, 변하며, 화한다는 게 이 구절의 의미이지 싶다.

03 오래전부터 ‘그때’를 위해
정조의 시간을 보면 실로 그러했다. 몸을 구부려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귀를 기울여 땅속으로 흐르는 물길의 소리를 듣고, 사람과 동물의 발자국을 찾아 그 굵기와 떨림과 방향과 기운까지 알아채려는 간절함이 묻어 있다. 어쩌면 하늘의 소리는 그렇게 들어야 하는지 모른다. 이를 두고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하는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정조의 꿈이었던 화성 신도시 건설의 과정은 그가 살아낸 ‘치곡’의 시간을 잘 말해준다. 이 계획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권을 의미하는 이장(移葬) 계획과 궤를 함께 했다.
준비하는 오랜 시간동안 그는 새 묘지 자리를 물색했고, 이장할 때의 원칙도 정해두었다. 묘지가 들어서자면 그곳에 살던 민가 200여 호를 이주시켜야 했는데 이들에게 좋은 이주지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보상도 충분히 했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혹시 생겨날지 모를 원망을 없애고자 백성의 강제부역을 금하고 임금을 지불했으며, 이 재원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도 나라 돈을 쓰지 않고 왕실 내탕금을 아껴서 충당했다. 노론의 반대를 이처럼 공들여 무마한 셈이었다. 백성들이 이주해 갈 장소는 팔달산 아래 너른 땅으로 잡았다. 이곳이 바로 정조가 꿈꾼 새로운 도읍, 이른바 화성 신도시가 들어설 땅이었다.
이 거대한 계획은 재위 18년째인 해에 하나씩 실행되기 시작했는데, 이미 이때를 기점으로 오래 전부터 많은 것을 준비해왔다. 두 해 전에 미리 정약용에게 화성 설계안을 작성하도록 명했다. <도서집성>과 <기기도설> 등 희귀한 도서들을 하사하며 화성의 건축을 준비하게 했으니 정약용의 거중기 연구 또한 정조의 지시로 시작된 셈이었다. 또 체재공에게 화성 건설의 총괄 업무를 맡겼고, 체재공은 뛰어난 행정가 조심태에게 실무를 맡겨 준비하게 했다. 최고의 인재풀을 형성한 셈이었다.

04 수많은 밤들이 모여 태어난 ‘화성’
화성 건설이 시작된 1794년은 한양 천도 400년을 맞는 해였다. 그해 원단(元旦)을 맞기 위해 정조는 사도세자의 사당인 창덕궁 경모궁에 머물렀다. 정조에게 화성 건설은 하나하나 공들이고 정성을 다하는 수행자의 일과도 같았다. 여러 신하들이 부역을 제안했으나 끝내 물리쳤고, 더워서 일꾼이 쓰러질까 봐 어의와 상의하여 더위를 씻는 약을 만들어 보냈으며, 가뭄이 계속되자 공사를 일시 중지하여 군말조차 없앴다.
정조의 화성은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태어난 도시가 아니었다. 정조는 오랫동안 규장각에서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그 책이 제시한 세상을 꿈꾸며, 실현의 길을 찾아내느라 밤을 지새운 결과였다.
그야말로 정조의 그 하얀 밤들이 모이고 쌓여 축성된 도시가 화성이었다.
가령 화성은 유형원의 <반계수록>이 꿈꾼 이상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도시였다. 즉, 유형원이 제시한 정전제 곧 농민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는 제도와 병농일치의 부병제가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이를 위해서 정조는 화성 착공 한 해 전에 이미 왕실수비대인 장용위를 장용영으로 확대 개편해둔 상태였다. 그만큼 깐깐하고 꼼꼼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 확인한 개천의 물을 이용하여 저수지를 만들고 황무지를 개간해 둔전 성격의 농장을 조성했다. 여기에도 최신 과학기술이 도입되었고, 일꾼들에게는 도급제로 임금을 지불했다.
이곳으로 전국의 유민이 몰려왔고, 상가가 형성되었으며, 이를 위해 금난전권 곧 서울 시전 상인이 가진 그들만의 특권도 폐지했다. 도시에 십자로 길을 만들고 도로 양편에는 상가를 조성했다. 이때가 정조 재위 20년으로, 28개월 만에 준공한 것이었다. 참으로 공을 들인 대업이었다.

※ 정조의 역사적 내용은 이덕일 교수의 책 <조선왕을 말하다>(위즈덤하우스) ‘정조편’을 기초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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