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온다’는 ‘자서전 쓰기학교’에서 만난 소중한 이야기들을 담는 코너입니다.

“다음 주 수요일에 휴가 낼 수 있어?”
“어. 왜?”
“나, 그날 어디 다녀와야 해. 당신이 애들 학교 보내고, 학교 끝나면 학원도 좀 보내줘.”
“어디 가?”
“있어. 나중에 말해줄게.”

아내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독서논술 과외도 휴강을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아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휴가를 내고 아이들 아침상을 차리고, 학교에 잘 다녀오라고 인사도 하고, 설거지와 청소를 한 뒤 집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열 시가 가까웠다. 아내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점심을 먹으려고 국 냄비를 불에 올리려고 할 때 아내로부터 문자가 왔다.

“아, 짜증 나.”
“왜?”
“망했어.”
“뭔 소리야?”
“그럴 일 있어.”

아내가 보낸 뜬금없는 문자에 황당해 하면서 나는 국에 밥을 말아 점심을 때우고, 학교 마치고 돌아온 둘째를 다시 학원에 보낸 뒤 내 일을 좀 보고, 몇 통의 전화를 받고,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아내가 미리 준비해둔 호박전으로 간식까지 차려주었다.

“아빠, 엄마 어디 간 거야?”
“비밀이래.”
“남자 친구 만나나 봐.”
“진짜?”
“아빠 지금 긴장했지?”
“놀릴래?”

아내가 오기 전에 저녁을 준비하려고 마트에 가서 잠깐 장을 봤다. 특별히 아내가 좋아하는 ‘잡채’를 만들 생각으로 인터넷을 뒤져 조리법을 베낀 뒤 달달한 화이트와인까지 싸게 한 병을 구입했다. 아이가 숙제를 하는 동안, 제법 오래 걸려서 그럴 듯한 잡채를 끝내려는데 아내가 돌아왔다. 여섯 시가 훌쩍 넘었다. 풀이 다 죽은 표정으로 돌아온 아내는 무너지듯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어디 갔다 온 거야?”
“아아아….”

아내는 그제야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날 하루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백일장, 자세히는 주부들 대상 백일장에 참가했는데, 상금이 탐나서 작정하고 준비했단다. 상금 받아서 어디에 쓸지 미리 리스트까지 뽑아놓고 나서…. 그런데 억울하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제출 시간을 못 맞췄다느니, 스무 장을 써야 할 걸 아홉 장밖에 못 썼다느니, 알고 보니 제출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받아주더라느니, 그럴 줄 알았으면 왜 처음부터 시간 지나면 무효라고 뻥을 쳤냐는 둥, 놓쳐버린 상금이 아까워 죽겠다는 둥….
나는 그런 휑한 이야기들을 다 듣고 난 뒤 어이가 없어서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백일장에 붙는 건…” 하고 위로도 무엇도 아닌 말을 해주고는 “밥이나 먹자”며 식탁으로 아내를 이끌었다.
식탁에 놓인 잡채와 와인을 본 아내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그러면서 “알았어? 오늘이 무슨 날인지?” 하고 말하는 바로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도 뚝딱뚝딱 뭔가가 급하게 돌아가며 ‘아차’ 하고 하얗게 아찔해졌다가 금세 입으로는 당연하다는 듯 “그럼, 결혼기념일이지” 하고 말했다. 아 얼마나 기특한 순발력인가. 나도 놀랄 만큼 하도 매끄러워서 아내도 속아 넘어갔다. 그런데….

“그래도 20주년인데 잡채에 와인, 이건 너무하지?”
20주년이었던가, 오늘이? 헐! 나는 그걸 잊고 있었다, 아무리 살기가 퍽퍽해도 그렇지, 그제야 아내의 진짜 진심이 나왔다. 백일장 입선이란 건, 아니 그 상금이란 건 결혼 20주년 선물 값이었음을, 그리고 그 황당하고도 거창한 선물이란 게 아내의 말에 따르면 억울하게(?) 날아갔다는 사실까지 비로소 알게 됐다.

박명철 기자
자서전 집필 강사로 활동하고 있고, 아름다운동행 자서전 쓰기학교의 주강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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