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가까이 사시기에 우리 아이들은 자주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는 편이다. 그런데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을 만나는데도 할아버지는 아이들 보기를 목말라한다. 정작 손자들을 만나면 인사할 때와 밥 먹을 때 빼고는 함께하는 시간이 거의 없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아이들도 할아버지 할머니 만나는 일을 특별히 반기지는 않는 눈치다.
“우리 아이들도 몇 년 지나면 친구 만나려고 하지, 어른들은 쳐다보지도 않을 거예요. 그러니 좀 귀찮고 피곤하더라도 아이들이 곁에 머무를 때 행복한 시간을 많이 만들어야 해요. 남산에 올라가서 보니까 ‘서울 할아버지’는 아이들이랑 눈도 잘 마주치고 말도 잘 통하더라고요.”
밥을 먹으면서 힐난하듯 슬쩍 흘린 말에 ‘고리타분한 시골 할아버지’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아이들 할아버지가 뭔가 결심한 듯 물었다.
“학교에서 일찍 끝나는 날이 언제냐? 인천 차이나타운이나 아이들과 함께 다녀와야겠다.”
근방에서 학창시절을 보낸지라 차이나타운은 세대를 이어 과거와 현재를 공유하기에 안성맞춤이겠다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 실제로 수십 년 만에 차이나타운을 다녀온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무용담이라도 되는 양 살짝 들떠 세월이 바꾸어 놓은 풍경을 전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한 첫 여행이 어땠는지 옆에서 까부는 아이들에게도 소감을 물었다.
“어휴, 하루 종일 걷기만 했어. 맥도날드인가 맥아더인가 군인 동상 하나 봤어. 다리 아파서 죽을 뻔했어. 짜장면 먹은 것만 좋았지.”
나는 맥아더 장군 동상을 떠올리면 친구들과 신나게 놀던 근처 야외 롤러스케이트장이 먼저 생각나는데 아이들에게는 맥도날드 햄버거가 먼저 생각나는 모양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맥아더 장군 동상을 보면서 한국전쟁으로 고달팠던 인생의 기억을 파노라마처럼 떠올렸겠지. 불과 60여 년의 시간 차이일 뿐인데 인천 차이나타운이라는 같은 공간을 두고도 세대별로 이렇게나 다른 이미지를 떠올린다. 범국가적인 ‘통합’도 아니고 한 집안 식구들끼리 작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조차 왜 이렇게 힘든 것일까?

위로, 아래로 온전히 함께하기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과 공간을 그대로 공유하지 않고는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꼰대가 되는 미래를 상상하기 싫었던 것일까, 나는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나 휴대폰 게임, 만화책, 보드 같은 스포츠 등을 닥치는 대로 함께한다. 하다 보니 내 취향이 본래 뭐였나 싶을 정도로 큰 재미까지 느낀다.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내 평생 해보지 못할 일들이었다. ‘끼인 세대’로서 ‘아래’로는 이런 식으로 용을 쓰면 될 것 같은데 그럼 ‘위’로는 어찌할 것인가? 타임머신 타듯 되돌아가서 그 삶을 살아볼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앞으로의 시간을 온전히 함께하기에는 서로 간에 다름을 인정할 만한 준비가 부족하다. 해결 방법은 아이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과거를 책으로나마 체험하는 것이다. 물론 쉽고 편하게 영화 같은 매체로도 경험할 수 있겠으나 영화는 사려 깊게 음미할 틈을 좀처럼 주지 않는다.

다행히 아이들과 나, 그리고 아이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모두 공유한 공간, 인천 차이나타운의 과거를 충분히 더듬을 수 있는 책이 있다. 오정희 작가의 단편소설 <중국인 거리>. 30여 년 전에 내가 경험한 차이나타운보다 3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 전혀 다른 낯선 시간, 하지만 아이들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는 너무 익숙한 일상과 얼굴들을 생생하게 마주할 수 있다.
소설 속 화자인 ‘나’와 함께 <중국인 거리>에 살았던 아이들은 순수한 동심과는 거리가 있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전쟁에서도 각박하게 살아남은 ‘작은 어른’일 뿐이다. 정육점에 가서는 “애라고 조금 주세요?”라고 따지고, 머리털을 주문한 대로 자르지 않는 이발사에게는 “그러길래 왜 아저씨는 이발만 열심히 하지 잡담을 하느냐 말예요!”라고 바락바락 악을 쓰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우리 집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이 슬쩍 슬쩍 겹쳐진다.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으며, 전에는 디자인하우스에서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스포일러 성격의 리뷰 글보다는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해져서 일부러 책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자는 무모한 목표를 설정하고 연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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