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겟 아웃

국내 극장가 생리를 볼 때, <겟 아웃>의 흥행은 상당히 의외예요. 그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아닌 소규모 영화여서만은 아닙니다. 일단 한국 극장가가 별로 반기지 않는 공포 장르로, 유명한 스타가 단 한 명도 나오질 않고, 주인공 또한 흑인입니다. 이 정도면 한국 관객들이 외면할만한 요소는 골고루 갖춘 셈이지요. 그런데 이 작품이 무려 2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점차 구체화되는 불편함
포털 사이트에 소개된 이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흑인 남자가 백인 여자친구 집에 초대받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우선 백인 여자친구는 인종적 편견이 전혀 없는 매우 진보적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흑인 남자친구를 뒀다는 것에 특별히 신경 쓰지 않고 그걸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녀의 부모 또한 굉장히 깨어 있는 백인 상류층으로, 열렬한 오바마 대통령 지지자입니다.
초반에 그려지는 이런 모습들이 묘한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어느 순간 백인 여자친구가 부끄러워하진 않을까? 백인 부모가 그래도 약간은 부담스러워하진 않을까? 그렇습니다. 흑인 주인공이 느끼는 어색한 감정을 관객 역시 그대로 공유하게 됩니다. 주인공이 ‘흑인’이라는 정체성에 뚜렷이 갇혀 있는 것처럼, 관객 또한 한 인간이 아닌, ‘흑인’이라는 인종적 선입견을 품고 바라보고 있는 거죠.

그런데 그 불편함이 점점 상투적으로 구체화됩니다. 여자친구 부모의 가사도우미로 흑인들이 고용되어 있고, 여자친구의 남동생은 주인공에게 매우 공격적입니다. 파티에 초대된 이웃 중에 섞여 있는 흑인은 피부색을 제외하곤 완전 백인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점점 소외돼요. 마찬가지로 관객 또한 더욱 맘이 편치 않아집니다.
그래서 관객 입장에선 반전이 펼쳐지는 후반부에 훨씬 맘이 편합니다. 인종적 편견이 노골적으로 까발려진 순간부터, 관객은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즐기게 되거든요. 이전의 불편함을 한 방에 날려버리듯 통쾌한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됩니다.

겉으로는 평등, 차별 여전한 미국 사회
트럼프 대통령을 뽑음으로써, 가장 보수적인 선택을 한 미국 사회에 대해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뚜렷합니다. 겉으로는 평등하고 차별 없는 사회를 내세우지만, 흑인에 대한 미국 사회의 편향은 여전하거든요. 흑인은 그저 뛰어난 신체 능력에 관한 아이콘일 뿐이고, 지적인 영역은 백인의 전유물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 구도가 실제적으로 깨져버린 겁니다. 오바마라는 흑인 대통령이 8년간 국정을 맡았고, 그는 그 어떤 역대 미국 대통령보다 높은 지지율 속에서 퇴임했습니다. 수많은 백인이 하급 ‘육체’ 노동자로 전락하는 중에 ‘화이트 트래쉬(white trash)’라고 불리는 가난한 백인 그룹의 자괴감이 확산되면서, 백인 사회의 박탈감은 날로 쌓여만 갔습니다. 이게 트럼프 대통령을 탄생시킨 배경입니다.

백인 사회는 흑인에 대한 우월감과 열등감을 함께 갖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과거 비인간적 노예제도 역사에 대한 반성과, 현실에서의 피해의식이 뒤섞여 양가적인 감정을 드러냅니다. 다분히 정신분열적인 태도이지요. 이런 사회의 불안을 <겟 아웃>은 은유적으로 그려냈습니다.
그런데 인종을 둘러싼 미국 사회의 이 정신분열적 구도를, 약간 응용해 우리 사회 전반에 대입시켜 볼 수 있습니다. 남성·여성, 노인·청년, 비장애인·장애인, 정규직·비정규직, 내국인노동자·이주노동자 등의 관계만 보더라도, 우월의식과 피해의식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그러면서 상대를 상대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와 차별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혐오의 감정을 표출합니다. 상대보다 우월적 지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더불어서 내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합니다. 이러다 보니 사회 전체가 조현병에 걸린 거 같습니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동행’이 간절한 시대입니다.

임택
대학에서 영화학과 미학을 강의하며, 철학과 인문학을 통해 영화를 독해하고, 시대와 소통하는 방법을 나누고 있다.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