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과 손톱 길이, 이 두 가지는 중세 사회에서 그 사람의 신분을 드러내는 기준이다.
먼저 단색(單色)만을 착용해야 하는 평민과 달리 귀족들은 다채(多彩)의 옷에 화려한 보석 장식을 했다. 가문을 자랑하는 문양을 옷깃과 왼쪽 어깨에 자수로 새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또한 손톱을 길게 기르는 것도 귀족만의 특권이었다. 사실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평민들에게 긴 손톱은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노동을 할 필요가 없는 귀족, 그들은 손톱을 기를 수 있었다. 그랬다. 긴 손톱은 그 자체로 특권신분이었다.
그런데 여기 ‘옷’은 분명 ‘옷’인데 ‘옷의 자격’을 ‘상실한 옷’이 있다. 그것은 곧 ‘수의’이다. 그런데 옷의 지위를 잃어버린 수의도 ‘두 종류의 수의’가 있다. 하나는 ‘죄인의 옷’인 수의(囚衣), 다른 하나는 ‘죽은 자의 옷’인 수의(壽衣)이다.
사색가 에릭 호퍼는 “사람은 무엇을 입는가에 따라 변한다”라 했다.
이 말은 전적으로 옳다. 옷은 단순히 몸을 감싸는 ‘의복’이 아니다. 그 이상의 의미를 함의한다. 곧 한 개인이 착용한 옷은 그 사람이 지닌 ‘삶의 품격의 수위(水位)’을 증명해 준다. 그래서 군인은 군복을, 운동선수는 유니폼을 몸에 착용하는 것이다.
요즘 옷에 대해 드는 생각, 그것은 ‘옷이 더럽다고 마음까지 더럽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음이 더러운 자는 반드시 옷이 더럽다’는 사실이다. 상식을 배반하고 진실을 멸시하는 사람들, 그들은 살아 있으나 사실 죽은 자들이다. 결국 그들이 입은 옷은 아무리 고가(高價)의 수제품이라 해도 결국 ‘수의’에 불과하다.
오늘, 방송작가가 말한 “신사란 비싼 옷을 입은 자를 말함이 아니라 자신의 옷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자를 말한다”라는 말이 유독 가슴에 닿는다.
그 이유는 지금 우리 주위에서 ‘죽은 자’ 아닌 ‘산 사람’이, 교도소 밖의 ‘자유인’조차 이 ‘두 수의’를 착용(着用)하며 당당히 사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런 까닭에 옷은 날개가 아니다. 옷은 그 사람의 삶이다.

김겸섭
성경해석 연구 공동체인 아나톨레와 문학읽기 모임인 레노바레를 만들어 ‘성서와 문학 읽기’ 사역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방화동 한마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사랑이 위독하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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