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아침마다 부엌에 계신다. 일찍 엄마를 하나님께 떠나보낸 아버지는 당신의 세 자녀가 깨기 전부터 콩나물국이나 된장국, 부추와 계란이 든 두붓국을 끓이셨다. 감자와 양파와 당근도 자주 볶았는데 그럴 때마다 고소한 향기가 부엌에 한 가득이었다. 부엌에서 아버지는 한 번도 웃음을 잃지 않았으며, 수저를 식탁에 놓는 그런 작은 일에도 마치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듯 조심스러우셨다. 아직 초등학생이던 막내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잘 표현해주는 한마디를 남겼다.
“아빠! 우리 부엌에선 아침마다 실로폰 소리가 나는 것 같아요.”
나와 둘째는 “맞아 맞아!” 하며 공감했는데, 정말이지 아버지의 부엌은 엄마가 떠나버린 뒤에도, 맑은 하늘처럼 눈부신 햇살이 비쳤다.
기억에 남는 건 매일 아침 아버지는 식사를 하기 전 세 자녀가 돌아가면서 성경을 읽은 뒤 기도를 하게 했는데, 우리들의 기도는 비록 짧고 소박하였으나 참 솔직했고, 어떤 기도문보다 간절하였다. 아침식사를 마치면 아버지는 바쁘게 등교준비를 하는 우리들의 준비물을 챙겨주거나, 신발을 닦아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무엇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아버지는 매일 아침, 등교하는 우리들을 꼬옥 안아주고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보내주었다.
우리가 모두 학교에 가고 나면 아버지는 비로소 오래 전부터 운영해온 헌 책방의 문을 열었다. 아버지의 헌 책방은 갈수록 손님들의 발길이 줄어들었으나 거기서 노끈으로 묶은 책 더미를 풀어서 정리하거나, 손님을 맞아 책 이야기를 나눌 때 아버지는 어느 때보다 평화로워 보였다.

아버지를 추억하게 된 까닭
벌써 오래 전에 우리들 곁을 떠난 아버지를 추억하게 된 까닭은 옛 노래를 들려주는 TV 프로그램에서 ‘아버지의 노래’를 들어서였다. ‘아버지의 노래’는 노래 제목이 아니라 아버지를 떠올리면 함께 따라오는 노래여서 나는 그렇게 이름을 붙여두었다.
내가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고 엄마와 함께 단란하게 살아가던 때, 우리는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방에 한 이불을 덮고 앉아서 동화를 읽거나 성경을 읽으며 밤늦도록 함께 시간을 보낸 뒤에야 잠들었다. 아버지는 밤마다 ‘새’ 동화책을 한 권씩 들고 오셨으므로 우리는 엄마의 목소리로 밤마다 동화를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가져오는 ‘새’ 동화책은 가끔 제본한 실밥이 터져서 너덜너덜 할 때도 있었으나, 새 이야기를 담은 책이었으므로 ‘새’ 동화책이었던 셈이다.
언젠가 동화 속에서 노래하는 아버지 이야기가 나왔는데, 나는 “아버지도 좋아하는 노래를 한 곡 불러보세요” 했고, 엄마까지 가세하여 아버지의 노래를 신청했으므로 아버지는 쭈뼛거리시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반쯤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짧은 가사였으나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도 아니고, 라디오에서 듣던 대중가요도 아닌, 동요인지, 흘러간 옛 노래인지 알 수 없는 노래였다. 아버지의 노래를 들으며 동생과 나는 배꼽을 잡고 웃었는데 곤두박질치듯 내리달리는 가락도 우스웠고 “피리를 불어주마, 울지 마라 아가야” 하는 가사도 우스웠다.
그 노래를 들은 건 아마 그때 한 번뿐이었지 싶은데 나는 오랫동안 그때의 기억을 가지고 살았던 것 같다.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그 어릴 때 들은 ‘아버지의 노래’를 TV에서 듣고는 금세 알아차렸으니까. 피리를 불어주마, 울지 마라 아가야. 산 너머 아주까리 등불을 따라, 저 멀리 떠나가신 어머님이 그리워. 네 울면 저녁별이 숨어 버린다. ‘아주까리 등불’이라는 제목도 처음 알았고, 무엇보다 그때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 든 지금에서야 그 노래의 가사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애절함이 배어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노래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별빛처럼 등불처럼 아버지의 기억 속에 깜빡깜빡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일사후퇴 때 부모님을 따라 이남으로 넘어오다가 폭격을 맞았고 바로 눈앞에서 폭탄과 연기 속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라져버리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였다. 아버지는 그때 이야기를 표현할 때면 언제나 “방금 눈앞에 있던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졌단다”라고 하셨는데, 그 후로 아버지는 눈앞에 있는 사람,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엄마까지 일찍 떠나보내면서 아버지의 두려움은 더 커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날마다 등교하는 세 자녀를 품에 꼭 안아주며 웃음으로 손인사를 하던 아버지의 아침인사는 어쩌면 당신의 두려움이 가져다준 절박한 ‘이별의식’이었는지 모르겠다.

박명철 기자
자서전 집필 강사로 활동하고 있고, 아름다운동행 자서전 쓰기학교의 주강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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