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를 좋아합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온갖 스포츠 신문을 섭렵하며 스포츠 기자가 되고 싶어 한 적도 있습니다. 당시 일본의 전설적인 투수 구와타 마스미에 관한 인터뷰를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파친코나 도박을 하지 않습니다. 제게 주어진 행운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야구에 걸고 싶습니다.”
야구는 실제로 그런 운동입니다. 잘 맞은 타구가 수비수 정면으로 날아가서 그대로 잡혀 아웃이 되기도 하고, 위력적인 투수의 공에 방망이가 부러지면서 빗맞은 타구가 이른바 ‘바가지 안타’가 되기도 합니다. 또 투수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기에 수비수들의 ‘알까기’ 같은 실수가 일어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 것이 투수의 마음이겠지요. “노력한다고 다 성공할 순 없지만 성공한 사람은 모두 노력했다는 것만 알아둬”라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곰돌이 푸’의 명대사가 절로 생각납니다.

야구선수 구와타 마스미를 오랜만에 떠올린 건 일본 드라마 ‘중판출래!’를 보고 나서입니다.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출판사 사장이 어떻게 회사를 일구었는지 회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불후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 자포자기로 살아갑니다. 어느 날, 평소처럼 도박을 하고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밤길에 강가에서 낚시를 하는 노인에게 강도짓을 합니다. 그런데 도인 같은 풍모의 노인은 전혀 겁을 먹지 않고 이런 말을 건넵니다.
“나를 죽이면 네 운은 거기서 끝이다. 세상은 말이지 더하고 빼면 남는 게 전혀 없다. 갖고 태어난 거에 차이는 있어도 패를 몇 장 받는지는 다 똑같아. 좋은 일을 하면 운이 모이고 나쁜 짓을 하면 금세 운이 줄어든다. 사람이라도 죽여 봐라. 너도 그 길로 끝이다. 운을 모으다 보면 그 운이 네 편을 들어 주어 몇 십 배로 복이 부풀어 오르는 거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잘 생각해 봐라.”
더 이상 아무 짓도 하지 못하고 달아난 후, 새롭게 삶을 사는 그에게 어느 날 함께 일하는 노동자가 시집 한 권을 건넵니다. 그 책이 바로 <비에도 지지 않고>입니다. 그날 밤, 그는 시를 읽으며 자신도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으로 눈물을 흘립니다.
그림책 <비에도 지지 않고>를 소개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우리미술관 책방에 비치된 <비에도 지지 않고>를 읽고 난 어느 분은 마치 성경을 읽는 것 같다고 평을 한 적도 있습니다(그러고 보니 시를 쓴 미야자와 겐지의 고향 이와테 현은 일본에서도 기독교가 가장 먼저 들어온 곳으로 손꼽히네요). 급기야 간만에 본 일본 드라마에도 <비에도 지지 않고>가 등장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 어려서부터 어른들이 수시로 던진 질문인지라 때때로 저 스스로도 묻곤 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질문을 40세가 훌쩍 넘은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대학생 때 저는 나이 40이면 사회적으로도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으며 그렇지 못한 다 큰 어른들을 욕하기도 했는데 저 또한 다를 바 없이 나이만 먹어갑니다. 그래서 조급한 마음을 붙들고 사는 제게 어제는 유치원 아이들이 카네이션을 건네주었습니다. ‘어버이날’도 지났는데 내게 왜 이런 걸 주지?’하고 궁금했는데, 그러고 보니 ‘스승의 날’이란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아, 맞다. 내가 선생님 소리도 듣는 사람이었구나.’ 꼬마들마저 제게 ‘그런’ 사람이 되라고 마구 졸라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림책 <비에도 지지 않고>는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원작 <은하철도의 밤>으로 유명한 미야자와 겐지의 시를 배경으로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서른일곱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겐지가 병마와 싸울 때 수첩에 적은 시이지요. 비에도, 바람에도,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사람, 모두에게 멍청이라 불리며 칭찬도 미움도 받지 않는 ‘그런’ 사람의 모습에서 마음의 용기와 마음의 평화를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으며, 전에는 디자인하우스에서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스포일러 성격의 리뷰 글보다는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해져서 일부러 책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자는 무모한 목표를 설정하고 연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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