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저녁 5시 30분이 되면 정신없이 놀다가도 멈추고 텔레비전을 보러 집으로 돌아갔다. 애국가로 방송이 시작되고 대략 10분간의 뉴스가 끝나면 각 방송사에서 일제히 시작되는 만화는 놀이로 지친 나의 심신을 위로하는 ‘칠성사이다’와 같았다. 지루한 뉴스조차도 만화가 방영되기 전이라면 ‘이왕표’가 등장하는 프로레슬링 경기 앞서 열리는 오픈 게임처럼 기다림의 흥분마저 느끼게 했고, 뉴스를 전달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때로는 ‘만화를 보기 전에는 반드시 화장실에 다녀와야 한다’는 경고처럼 들릴 때도 있었다.
집안 어른들은 입을 헤벌리고 텔레비전 만화와 만화 잡지 〈보물섬〉에 빠져 있는 나에게 ‘다 큰 아이가 아직도 만화를 보냐’며 뭐라 하셨다. 그래도 만화 보기를 그치지 않자 급기야 어머니와 면담을 하신 선생님은 나를 따로 불러내 만화 보기를 끊는다면 훨씬 더 공부를 잘할 거라고 타이르기에 이르셨다. 주변 걱정을 나 몰라라 하기엔 너무나 어설픈 모범생이었던 나는 그 후로 만화를 서서히 멀리하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해적판 〈드래곤볼〉을 필두로 일본 만화가 선풍을 일으켰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만화방 유행으로 만화가 지적 대화의 화두가 되었던 대학 시절에도 나는 만화에 열광했던 과거가 언제 있었느냐는 듯 만화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인간형이 되어버렸다.
지난해는 ‘로보트 태권V’ 탄생 40주년이었다. 가물가물한 옛 기억이 새로웠다. 태권V를 만들고 싶어서 장래 과학자가 되겠다던 꼬마 박사들은 얼마나 많았고, 태권V를 닮고 싶어서 태권도를 배우겠다던 권법 동자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어떤 학자들은 ‘아동’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것을, 아동이 주로 하는 것으로 보이는 ‘놀이’와 ‘오락’을 새로운 돈벌이 시장으로 창출하기 위한 ‘교묘한 자본주의의 전략’이라고 비판하지만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둥그런 지붕을 뚫고 태권V가 출동하기를 바랐던 아이들이 자라서 현재 한국을 세계 3대 로봇 강국으로 성장시킨 걸 보면 소비시장이 충동질했다는 아이들의 ‘놀이’와 ‘오락’이 무럭무럭 키워낸 꿈과 상상력의 힘을 섣불리 무시하기는 어렵다.

아이들 스스로 고르게
책읽기가 좋은 습관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에게 칸트의 <판단력 비판〉같은 책을 안겨 주는 것은 무모한 행동일 것이다. 책을 직접 고르게 하려고 애써 찾아간 서점에서 아이들이 만화 서가에서만 머물러도 나는 입을 꽉 다물고 다른 분야의 책도 살펴보는 게 어떠냐는 등의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만화를 통해서 아이들의 꿈과 상상력이 더 오랜 시간 동안 아이들의 삶을 충동질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부터라도 만화에 열광했던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어른’에서 ‘아동’으로 재탄생해야 할 이유는 또 있다. 요즘 아이들이 만화 캐릭터를 따라 그리는 데 머물지 않고 그림을 그려서 거침없이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을 보면 세상이 이미 ‘텍스트의 시대’에서 ‘이미지의 시대’로 들어섰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이미지로 말하고 이미지로 듣는 것이다.

다행히 만화 서가에 어른들도 함께 읽을 만한 만화책이 많다. 그 중에서 다니구치 지로가 우쓰미 류이치로의 감성적 단편소설 <느티나무의 선물>을 만화로 그린 책이 눈에 띈다. 사람과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 원작을 성실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다 보고 나면 누구라도 좋은 소설책 한 권을 읽은 듯한 감상에 젖을 것이니 혹시라도 품었던 만화책에 대한 부정적 편견일랑 진즉 내려놓아도 좋겠다.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으며, 전에는 디자인하우스에서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스포일러 성격의 리뷰 글보다는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해져서 일부러 책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자는 무모한 목표를 설정하고 연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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