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어른들은 입을 헤벌리고 텔레비전 만화와 만화 잡지 〈보물섬〉에 빠져 있는 나에게 ‘다 큰 아이가 아직도 만화를 보냐’며 뭐라 하셨다. 그래도 만화 보기를 그치지 않자 급기야 어머니와 면담을 하신 선생님은 나를 따로 불러내 만화 보기를 끊는다면 훨씬 더 공부를 잘할 거라고 타이르기에 이르셨다. 주변 걱정을 나 몰라라 하기엔 너무나 어설픈 모범생이었던 나는 그 후로 만화를 서서히 멀리하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해적판 〈드래곤볼〉을 필두로 일본 만화가 선풍을 일으켰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만화방 유행으로 만화가 지적 대화의 화두가 되었던 대학 시절에도 나는 만화에 열광했던 과거가 언제 있었느냐는 듯 만화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인간형이 되어버렸다.
지난해는 ‘로보트 태권V’ 탄생 40주년이었다. 가물가물한 옛 기억이 새로웠다. 태권V를 만들고 싶어서 장래 과학자가 되겠다던 꼬마 박사들은 얼마나 많았고, 태권V를 닮고 싶어서 태권도를 배우겠다던 권법 동자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어떤 학자들은 ‘아동’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것을, 아동이 주로 하는 것으로 보이는 ‘놀이’와 ‘오락’을 새로운 돈벌이 시장으로 창출하기 위한 ‘교묘한 자본주의의 전략’이라고 비판하지만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둥그런 지붕을 뚫고 태권V가 출동하기를 바랐던 아이들이 자라서 현재 한국을 세계 3대 로봇 강국으로 성장시킨 걸 보면 소비시장이 충동질했다는 아이들의 ‘놀이’와 ‘오락’이 무럭무럭 키워낸 꿈과 상상력의 힘을 섣불리 무시하기는 어렵다.
아이들 스스로 고르게
책읽기가 좋은 습관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에게 칸트의 <판단력 비판〉같은 책을 안겨 주는 것은 무모한 행동일 것이다. 책을 직접 고르게 하려고 애써 찾아간 서점에서 아이들이 만화 서가에서만 머물러도 나는 입을 꽉 다물고 다른 분야의 책도 살펴보는 게 어떠냐는 등의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만화를 통해서 아이들의 꿈과 상상력이 더 오랜 시간 동안 아이들의 삶을 충동질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부터라도 만화에 열광했던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어른’에서 ‘아동’으로 재탄생해야 할 이유는 또 있다. 요즘 아이들이 만화 캐릭터를 따라 그리는 데 머물지 않고 그림을 그려서 거침없이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을 보면 세상이 이미 ‘텍스트의 시대’에서 ‘이미지의 시대’로 들어섰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이미지로 말하고 이미지로 듣는 것이다.
다행히 만화 서가에 어른들도 함께 읽을 만한 만화책이 많다. 그 중에서 다니구치 지로가 우쓰미 류이치로의 감성적 단편소설 <느티나무의 선물>을 만화로 그린 책이 눈에 띈다. 사람과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 원작을 성실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다 보고 나면 누구라도 좋은 소설책 한 권을 읽은 듯한 감상에 젖을 것이니 혹시라도 품었던 만화책에 대한 부정적 편견일랑 진즉 내려놓아도 좋겠다.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으며, 전에는 디자인하우스에서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스포일러 성격의 리뷰 글보다는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해져서 일부러 책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자는 무모한 목표를 설정하고 연재를 시작했다.
장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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