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을 읽으면서 특별히 인상적인 것은 그때의 교회가 대단히 공동체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제자 열두 명이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는 ‘각각’ 자기 생각 속에서 생활만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해진 사도들은 한결같이 자기를 잊어버리고 ‘함께’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섬기고 있습니다.

군중 속에 숨어있는 나
‘우리’라는 말은 참 좋은 말입니다. 우리는 ‘나’보다 성숙한 말입니다. 우리는 ‘나’보다 따뜻한 말입니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이 ‘우리’가 참 위험하기도 합니다. 우리 속에는 숨을 데가 많이 있어서, 나 하나 빠져도 아무 문제없을 것 같은 비겁한 생각이 듭니다.
집단 속에 있으면 자기 책임을 피하거나 무시하려는 심리가 생긴다는 실험 결과가 있습니다.
예전에 뉴욕 주택가 골목에서 한 여성이 흉기에 찔려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피해 여성이 살해되기까지 30분 이상이 걸렸고, 적어도 38명 이상이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피해 여성을 돕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경찰에 신고전화조차 걸지 않았다는 것이 사후 조사로 밝혀졌습니다. 매스컴마다 평론가나 전문가들이 나와서 목격자들의 냉담한 행동에 대해 도덕의 붕괴니 도시 생활이 부른 극단의 개인주의니, 소외니, 무관심이니 하며 사람들이 비인간화 된 탓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책임감 분산에 기대는 나
그 때 이런 견해에 의문을 제기한 심리학자가 있었습니다.
개인적 요인보다 상황적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짐작하였습니다. 나 외에도 다른 목격자가 있으니까 도와주어야겠다는 책임감이 분산되었고, 내가 돕지 않더라도 만약의 경우 비난을 분산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그들을 소극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가설을 실험한 결과 목격자가 많을수록 개인의 책임감이 분산되어, 그 상황에 뛰어들어 돕는 행동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목격자가 많을수록 신고하는 사람이 적어지고 또 신고하는 시간이 늦어졌다는 실험적 연구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타인에 대한 관심의 결여 또는 여러 사람 속에 숨어있는 군중 속의 ‘나’의 허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anybody) 할 수 있는 어떤 일을 두고 모두(everybody)가 생각하기를, ‘누군가(somebody)가 할 거야’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결과는 아무도(nobody) 그 일을 안 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라는 군중 속에 숨어버린 ‘나’의 함정입니다.
자아실현 아닌 자기부인
‘나’를 넘어선 ‘우리’는 막강합니다. 그러나 나를 넘어서기가 어렵습니다. 기독교신앙은 자아실현이 아니라 자기부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삶이 그저 그렇고 지지부진한 것은 자기를 넘어서지 못하는 데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뛰어넘을 때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보라!”고 할 수 있어야
사도행전에 예수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이 평생 앉은뱅이로 살았던 사람을 고친 이야기가 나돕니다. 그때 앉은뱅이를 향하여 ‘우리를 보라!’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외치면서 베드로는 한 사람의 어두운 생애를 뒤집어 놓습니다.
이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뛰고 찬송하는 기적을 본 사람들이 솔로몬 행각이라고 하는 곳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였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우리를 보라고 말한 베드로가 이번에는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말합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것은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일어나 걷게 된 것은 우리에게 무슨 권능이 있거나 우리가 퍽 경건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우리를 주목하지 말고, 예수님을 주목하십시오.
우리를 주목하라고 말한 사람은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처음에 ‘우리를 보라’고 말한 것은, ‘우리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라’고 말한 셈입니다.
세상은 우리 속에 그리스도가 계신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우리를 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때에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라 말해야 합니다. ‘나’를 주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삶으로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허봉기
미국 뉴저지 찬양교회를 담임목사로 1999년부터 섬기고 있다. 예배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힘쓰며, 변화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섬기며 전도하는 예배공동체를 꿈꾸는 목회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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