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제3세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인 위화는 장편소설 <허삼관매혈기>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장예모 감독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살아간다는 것>의 원작자도 위화입니다. 위화의 첫 직업은 치과의사였습니다. 병원에서 그는 가장 어렸기에 이를 뽑는 일 외에 여름마다 약상자를 어깨에 메고 마을의 공장과 유치원을 찾아가 노동자들과 아이들에게 예방주사를 놓았습니다.

문제는 일회용 주사기도 없고 물자도 부족해 사용한 주사기를 간단히 소독만 하고 다시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반복해서 사용하다 보니 바늘 끝이 구부러져서 팔뚝에 바늘을 꽂기도 힘들고, 주사기를 뺄 때 작은 살점이 바늘을 따라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주사를 맞을 때마다 노동자들은 이를 악물고 극심한 고통을 참곤 했습니다. 하지만 위화는 그들의 아픔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으레 모든 주사기는 바늘이 그렇게 구부러져 있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유치원에서 어린이들에게 주사를 놓을 때 위화는 충격을 받습니다. 아이들은 참지 못하고 울었죠. 어린아이의 팔은 연하여 어른들보다 더 큰 살점이 떨어져 나왔고요. 문제는 주사를 맞으며 우는 아이들보다, 주사 맞을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울음이 더 컸습니다. 두려움의 눈물이었던 게지요. 유치원은 온통 울음바다였습니다.

위화는 아이들의 울음을 보고서야 비로소 공장 노동자들의 고통을 의식할 수 있었습니다. 주사를 놓기 전 먼저 자신의 팔에다 주사를 놓아보았더라면 그 고통을 의식할 수 있었을 텐데, 위화는 그런 아쉬움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는 주사를 놓고 돌아온 뒤 혼자 병원에서 모든 주삿바늘의 구부러진 부분을 뾰족하게 부싯돌에다 가는 일을 했습니다. 바늘을 다 갈고 나서야 몸을 씻고 소독을 했습니다. 그래서 위화는 매일 날이 어두워진 뒤에야 집으로 퇴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위화는 이때의 경험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진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공감하는 것이야말로 사람들 사이를 가장 쉽게 소통하는 길임을 깨달았습니다. 고통이 소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사람들의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 뻗어 나오기 때문이라고 믿었지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중국의 고통을 쓰는 동시에 나 자신의 고통을 함께 썼다. 중국의 고통은 나 개인의 고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화는 중국 사회의 이면에 감춰진 온갖 부조리를 목도하며 때로는 절망하고 분노하지만,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깊은 연민과 단단한 연대의 의지를 내비침으로써 함께 공감하고 소통하는 작품을 쓸 수 있었습니다.
모국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치환하여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우리는 위화 문학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또 우리가 발 디디고 살아가는 이 땅에 대한 올바른 애정이 어디서 출발하는지도 깨닫습니다. 즉 고통을 함께 나눔으로써 온전히 소통할 때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곳의 속살을 비로소 느낄 수 있다는 의미이지요.

평화가 어느 때보다 갈급하고 공감과 소통의 가치가 절실한 5월을 맞으며 우리 안의 아픔을 나의 고통으로 치환하여 받아들이는 태도야말로 주님이 가르쳐준 십자가의 방식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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