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집 딸들이 동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치한 우리 집 아들들을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볼 때면 ‘이갈리아의 딸들’이 나랑 같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절로 실감한다.
출간된 지 40년이 지난 소설책 <이갈리아의 딸들>은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 체계가 완전히 뒤바뀐 가상 세계 이갈리아 모습을 통해 남성 중심의 현실 세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도록 이끈다. 작가 브란튼베르그는 생물학적인 특징으로 남성을 여성보다 위에 두거나 여성을 남성보다 아래에 두는 것 모두 얼마나 큰 편견이고 허상인지를 암시하지만, 요즘 나는 ‘성 평등’이라는 개념을 넘어 실제로 여성이 남성보다 우위에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느낄 때가 많다.

주변에서 만나는 이갈리아의 딸
요즘 주변에서 만나는 이갈리아의 딸들은 학업, 운동, 리더십 등 모든 면에서 남성을 능가한다. 철의 여성으로 불린 전 영국 수상인 마거릿 대처, 무대에서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드러내는 마돈나 등 구체적인 예를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단언컨대 나에게 이갈리아의 딸은 분명 ‘각시’다. 만약 당신이 나와 비슷한 또래의 30∼40대 유부남이라면 당신 또한 이갈리아의 딸과 결혼해 살고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사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동안 당신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은 유능한 직장인이면서 동시에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는 지나친 요구를 하면서 그녀들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처음부터 애써 외면했을지 모른다.

그럼 이쯤에서 각시를 소개하겠다. 각시로 말할 것 같으면 완전히 남성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성적인 것도 아닌, 남성과 여성이 합쳐진 인간형이다.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현재 각시는 나와 결혼해서 아들 둘을 낳고 아무 문제없이 잘 살고 있으므로 행여 성 정체성을 의심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각시는 ‘절충형의 인간’이라고 할 만하다. 남성의 긍정적인 요소와 여성의 긍정적인 요소가 조화를 이룬 것. 회사에서건 집에서건 어떤 일을 하든지 결단력이 있으며 굉장한 추진력을 동반한다. 한마디로 강력한 사람이다. 뭔가 ‘포스(force)’, 힘이 느껴진다. 하여 결정하기 어려운 일을 당면할 때 믿고 따를 만하다. 함께 살다보니 ‘여자 말 들어서 손해 볼거 없다’던 옛말에 공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가부장적인 시대에도 여자들은 이갈리아의 딸들이었던 듯하다).
요즘 들어 부쩍 내가 각시보다 잘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회의적일 때가 많지만 적어도 학교 다닐 때 성적은 분명 내가 더 좋았다고 자신한다. 문제는 공부만 내가 더 잘했다는 점이다. 공부에 전념한다는 핑계로 그 나이 때 하면 딱 좋을 법한 것들을 모두 대학 입학 이후로 연기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각시를 만난 후 충격을 먹었다. 나는 죽어라 공부하고 들어간 대학을 각시는 할 거 다 하면서 들어갔다고 하고, 심지어 공부도 하고 싶을 때만 했단다. 게다가 나는 공부에 방해가 될 거라 지레 짐작하고 죽어라 안 맡았던 여러 리더 역할도 각시는 기분 좋게 해냈는데, 이를 별 거 아니었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갈리아의 딸들’에게 심리적인 면에서부터 밀리는 바로 나 같은 아들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연구자들은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되 남성과 여성의 긍정적 요소들을 두루 갖춘 양성성의 인간형이 살아남을 것이라면서 한국의 남성들도 하루빨리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녀들이 세상을 좀 더 유연하고 자신감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번에도 역시 문제는 아빠에게 있었다. 아, 20세기의 아들로 태어나 21세기 딸들이 약진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려니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니로구나. 하지만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 수 있고, 더욱이 스스로의 삶까지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다는데 내가 그 길을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다. 다만 수십 년 동안 살아오면서 익숙해진 것들을 이제 와 외면해야 한다는 게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결국 속편한 해결책은 하나다.
“아들들아, ‘이갈리아의 딸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이 가까워졌다. 세상이 하 수상하여 아빠는 너희들이 되도록이면 엄마를 닮았으면 좋겠구나.”
이 책을 읽으면 성역할에 대해, 특히 여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저지른 실수들이 절로 떠오른다. 참고로 이 책에서 다루어진 내용들을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내 인생의 많은 시간을 노여움과 불화로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라며 한숨을 수도 없이 쉬게 된다. 여성들만의 능력과 사고방식이 앞으로 점점 큰 경쟁력을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며 변화가 가속화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해 본다.

<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황금가지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으며, 전에는 디자인하우스에서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스포일러 성격의 리뷰 글보다는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해져서 일부러 책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자는 무모한 목표를 설정하고 연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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