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컨택트>

어느 날 갑자기 지구에 외계 생명체가 찾아옵니다. 그들은 특별한 액션은 취하지 않고, 그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지구인들을 불러들여 교신하기만 합니다. 미국정부는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언어학자 루이스와 물리학자 이안을 투입합니다.
SF영화라면 으레 보여줄 법한 화려한 액션은 철저히 배제한 채, 이 작품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목하고 있는 건, 그 외계 생명체와 어떻게 소통할 거냐는 거예요. 그들이 온 목적을 알기 위해선, 우선 그들의 언어를 이해해야 하고, 동시에 지구의 언어를 그들에게 이해시켜야 합니다.

바로 테드 창의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긴 <컨택트(원제: Arrival)>라는 영화입니다. 우선 이 작품은 “언어 체계가 생각을 결정한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을 기반으로 풀어갑니다. 즉 언어를 배우게 되면, 그 언어권 문화와 인식체계를 자연스레 익히게 된다는 건데, 사실 사제지간인 에드워드 사피어와 벤저민 리 워프가 이 가설에서 제시하고 있는 예들이 상당히 과장되어 있어서, 요즘은 크게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입니다. 어디까지나 가설인 거죠. 그럼에도 언어와 사고 사이에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는 점에는 많은 학자가 동의하고 있어요.

언어의 불완전함
여하튼 영화는 바로 그 ‘언어’에 대해 고민합니다. 20세기 이후, 현대철학의 중심엔 ‘언어’가 자리 잡고 있어요. 현대 철학이 언어에 주목하게 된 것은 그 언어가 지닌 훌륭함이나 완벽함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불완전함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언어로 표현하지만, 사실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더 거대한 세계가 있는 게 사실이니까요.
게다가 언어는 전달하는 과정에서 왜곡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소통의 도구로서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과거엔 언어를 그저 투명하다고 간주했어요. 뭔가를 말하면(쓰면), 그걸 듣는(읽는) 상대방도 그걸 있는 그대로 알아듣는단 말이었죠. 하지만 현대철학에서는 우리 입에서 튀어나온 언어와 그 의미가 바로 그렇게 1:1, 즉 필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요.
예를 들어 “꽃”이라는 단어를 보죠. 이 단어를 들으면, 장미·백합·튤립·코스모스 등, 사람마다 전혀 다른 꽃을 연상할 거예요. 어떤 이는 무늬를, 또 어떤 이는 사람을, 또 다른 이는 ‘아름다움’이라는 형용사를 떠올립니다. 이렇듯 사람마다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요. 이러다 보면, 끊임없는 오해와 오독을 불러일으킬 수 있게도 되지요.
완벽한 소통수단으로서 우상시 되었던 언어가 사실 너무나도 불완전한 도구였던 거예요. 그래서 흔히 그러지 않나요? 말은 많으나, 대화와 소통은 안 된다고.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3차원의 지구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외계인의 언어를 배운 언어학자 루이스는 지구인으로선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세계관을 경험하게 돼요. 원인과 결과, 시작과 끝으로 연결되는 물리 법칙을 넘어선 영역에 그녀는 도달합니다. 그랬을 때 루이스의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그녀는 필연적인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과정을 살아갑니다. 그녀에겐 더 이상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 과정 하나하나가 소중한 거지요. 그런 그녀의 모습은 결과를 중심으로 과정을,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를 평가하는 ‘결과 편향’(outcome bias)에 빠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신의 언어 앞에 선 인간
교회에서 목회자는 그 불완전한 언어로 절대자에 관해 설명해요. 성경은 신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로 풀어진 책이고, 설교는 고차원적인 신의 언어를 3차원 세계에 사는 인간의 불완전한 언어로 번역해 전달하는 과정입니다. 이건 외국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작업 이상의 고도의 지적인 작업이에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에 도전하는 거죠. 그걸 듣는 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준비하는 자나, 듣는 자나 함께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해요. 신의 언어 앞에 선 인간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임택
대학에서 영화학과 미학을 강의하며, 철학과 인문학을 통해 영화를 독해하고, 시대와 소통하는 방법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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