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
나는 이런 말 한 마디로 각시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을 것이다.

신혼 때 놀러온 사람들은 우리 집 분위기가 어디 콘도에 놀러온 것 같다고 놀릴 정도였다. 정말 생활하는 데 꼭 필요한 물건만 딱 갖추고 심지어 생활하는 데 좀 불편하지만 자주 쓸 물건이 아니라면 우리 집에 들여놓지 않았다.
방도 휑했고, 거실도 휑했고, 부엌도 휑했다. 딱딱한 바닥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다는 각시의 수면 습관만 아니었다면 분명 침대 대신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을 것이다. 다큐멘터리나 스포츠 프로그램 보기를 좋아하는 나를 각시가 배려하지 않았다면 거실에 텔레비전조차 없었을 것이다. 오늘 장 보고, 오늘 요리해서, 오늘 먹어야 건강하다는 우리 부부의 까다로운 소신이 일치한 덕분에 부엌 찬장에는 단출한 하얀색 그릇 한 세트 정도만 자리를 차지했다. 전자레인지 같은 맞벌이 필수품도 필요 없었다. 커다란 회색 냉장고 속이 텅텅 비어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허전하지 않았다.
가끔 동네를 산책할 때 창밖으로도 깨가 쏟아질 만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다른 집 신혼살림을 보면서 각시가 부러워하는 것이 마음에 좀 걸렸지만 나는 우리 집 살림살이가 참 좋았다.

살림을 합치다
몇 년 후 첫째 아기, 둘째 아기가 태어났다. 회사를 다니며 아기까지 돌보는 각시가 안쓰러워서 어머님이 ‘우렁각시’ 노릇을 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자연스럽게 어머님이 우리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다 이사를 가야 할 상황이 생겨 두 집 살림을 아예 하나로 합쳤다. 그 때 고령으로 혼자 계신 각시 외할머니가 아들딸 중에서 특별히 어머님을 좋아하신지라 할머니 살림까지도 합쳐버렸다. 그렇게 5년이 지났지만 온 집안 식구 나이를 합친 것만큼이나 불어난 살림을 감당하는 일은 여전히 쉽지는 않다.
나는 ‘살림이란 여백을 즐기는 일’이라는 말에 크게 공감하는 사람이다. 추사 김정희의 그림 ‘세한도’처럼 여백이 클수록 더 채울 여지도 생기고 몸집이 가벼우니 어느 때라도 가볍게 움직이며 유목민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영화 <박하사탕>에서 배우 설경규 씨가 열차가 달려오는 철길 위에서 “나 돌아갈래!” 라고 외쳤던 것처럼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고 불평할 만큼 내 인생이 뭔가 예상 범위 밖으로 한참을 달려왔다고 느꼈던 것이다.

밥상이 변하다
그런 내가 요즘은 변덕스럽게도 ‘이렇게 살게 되어 정말 다행이다’라고 되뇌며 아침을 맞이한다. 밥상이 차려질 때면 신혼살림을 시작할 때 어머님이 각시와 나를 위해 장만해 주신 부부 전용 꽃무늬 은수저가 우리 집 밥상머리에 제일 먼저 놓인다(참고로 다른 식구들 수저는 그냥 평범한 수저다). 허물없는 친구가 잠깐 우리 집에 들렀을 뿐인데도 지금까지 본 적 없던 화려한 식기가 식탁에 놓인 적도 있었다.
지난 정월대보름에는 아홉 가지 나물과 수건 세 장에 둘둘 말아 보온 중인 찹쌀오곡밥이 식탁 위에 올려 있었다. 나 이렇게 대접 받는 남자다! 그런데 이게 어디 내가 예뻐서겠는가? 딸 생각하는 어머님의 마음이 사위에게도 이어진 것이리라. 그 마음을 알기에 아침잠 많으신 어머님을 대신하여 출근길 각시를 위한 상차림을 내가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보기 좋게 차려내서 어머니와 남편의 마음을 우리 집 가장, 각시에게 그대로 전할 수 있기를 바라며 수저를 올려놓고 밥과 반찬을 ‘레이아웃(배열)’한다.

나라는 인간…. 한 권의 책으로 삶의 양식을 바꿀 만큼 가벼운 사람이었나 싶지만, 적어도 약간은 <먹고 마시고 그릇하다>를 읽고 난 뒤부터 생긴 변화라는 것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변명하자면, 텅 빈 그릇처럼 단순한 생활용품 만들기를 고집하는 ‘무인양품(MUJI)’ 디자이너 하라 케냐도 그의 집 인테리어가 어떤 분위기인지를 묻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변한 적이 있다.
“아내가 레이스를 좋아해서…, 전혀 ‘무인양품’스럽지가 않아요. 인생이 그런 거죠.”

<먹고 마시고 그릇하다_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아서>, 김율희, 어떤책

장다운
보름산미술관에서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으며, 전에는 디자인하우스에서 문화예술 관련 단행본을 만들었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스포일러 성격의 리뷰 글보다는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해져서 일부러 책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자는 무모한 목표를 설정하고 연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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