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희망>

톨스토이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천사 미하일은 두 아이를 낳은 어머니의 영혼을 거둬오라는 신의 명령을 거역해 인간 세상으로 쫓겨난다. 미하일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지상에 내려온 미하일은 구두 수선공 시몬을 만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다.
바로 ‘사랑’이다. 인간은 사랑하기에 살 수 있고, 사랑하기에 산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1, 13)
여기, 또 한 명의 ‘구두 수선공 시몬’으로 김진숙 목사(사진ㆍ위)를 소개한다. 무려 40여 년을 오직 미국의 홈리스(homeless, 노숙인)들을 위해 헌신해 온 사역자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때 월남해 격동의 70~80년대를 온 몸으로 밀어내며 ‘생존’했다. 그러고는 미국으로 건너가 복지재단에서 일하다 52세의 나이에 미국장로교총회(PCUSA) 목사가 되었다. 막달라마리아홈리스여성교회와 미국장로교총회 여성분과 순회강사, 둥지선교회 대표로 ‘세상의 작은 자’들과 함께 살았다.

‘또 한 명의 홈리스’
미국의 홈리스들은 얼마나 될까? 가장 부유한 나라에 속하지만, 매일 밤 미국의 밤거리를 배회하는 홈리스는 무려 70~100만 명. 술과 마약에 찌든 채 온갖 폭력과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된 홈리스들의 평균 수명은 48세, 시간이 흐를수록 여성과 아동, 노인들로 그 연령층이 확대되고 있다. 이런 홈리스들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이 책에 소개된 한 여성의 사례다.

‘자넷(가명)은 아직 젊은 여성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에게는 벌써 여섯 명의 자녀가 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의 아버지는 모두 제각각이다. 한때 지역 갱단에 인질처럼 붙잡혀 있었는데 그곳의 깡패들은 자넷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댄 채 강간을 했고 수시로 협박을 하거나 피 묻은 옷 빨래 같은 허드렛일을 시켰다.’

극단적인 예지만, 삶의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는 홈리스들의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김진숙 목사가 이해하는 홈리스들은 ‘아픈 사람들’이고 그 질병의 뿌리는 ‘절망’이다. 홈리스는 삶과 세상에 절망한 사람들이고 그 절망의 끝에서 스스로 생의 의지를 놓아버린 사람들이다.
김 목사가 이런 사람들을 공감하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절망’이다. 그 역시 삶의 가장 깊은 밑바닥까지 내몰려갔고 거기서 자신 역시 ‘또 다른 홈리스’였음을 깨달았다. 김 목사에게 이런 절망은 아들의 죽음과 함께 찾아왔다.

눈물 속에서 발견한 홈리스
유난히 똑똑하고 운동도 잘했던 아들 형이는 김 목사에게 삶의 기쁨이었다. 그런 아들의 이른 죽음은 김 목사에게 끝없는 자책감과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아들의 죽음 이후, 이 책에 묘사된 김 목사의 삶은 ‘눈물’이었다.

‘형이와 같이 햄버거를 먹던 가게를 지나며, 함께 운동하던 공원을 지나며, 그 아이가 다니던 학교, 살던 동네, 살던 집, 살던 방, 그 모든 것이 내게는 눈물이었다. 무덤 앞에 앉아 통곡하는 게 매일의 일과였다. … 형이 방에서는 인기척이 났고 내가 부엌에서 방을 향해 걸으면 바람같이 무엇인가가 나를 따라왔다.’

마치 ‘살아있는 시체’처럼 살았던 ‘절망의 시간’ 속에서 김 목사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고, 비로소 자신처럼 절망하며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이 바로 ‘홈리스’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상태의 홈리스가 바로 여성들이었다. 이후 김 목사는 교회의 작은 공간을 빌려 홈리스 사역을 시작했고, ‘홈리스 근절’을 삶의 목표로 40여 년의 삶을 헌신했다.

‘보랏빛 여성의 꿈’
보랏빛 티셔츠에 보랏빛 치마와 스카프를 즐겨 매는 김 목사는 스스로를 ‘보랏빛 여성’으로 부른다. 이 보랏빛은 사순절 고난의 색깔이고 그가 PCUSA 순회 목회자로 6년간 미국 전역을 돌며 ‘홈리스 근절’을 외칠 때 내세웠던 ‘새로운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노숙 여성들을 위해 쉼터와 식사를 제공하고, 이들이 자활할 수 있도록 공부하고 일자리까지 제공받게 통합적인 자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김 목사는 이제 80세가 넘었다. 그리고 팔순잔치 선물들을 모아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 젊은 홈리스들의 장학사업을 위해 ‘김진숙교육재단’을 설립 운영하고 있는 김 목사는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과 체력으로 미국 대학들을 찾아다니며 홈리스들의 취학을 돕고 있다.
미국 홈리스들의 대모(代母)로 거듭나기까지, 질곡의 현대사를 작은 몸으로 밀고 갔던 ‘보랏빛 여성’의 삶과 꿈이 이 책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왜 사는가?’란 질문의 한 해답이 이 책에 제시되어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0).

김지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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