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배우 장두이

캄캄한 무대, 조명이 켜지면 또 하나의 세상이 펼쳐진다. 가상의 공간이지만 꿈틀꿈틀 연극 속 캐릭터는 생명을 얻어 움직이고, 울고, 웃으며 한 생(生)을 산다.
그렇게 무대에서 여러 사람의 삶들을 살아내는 이들은 삶을 어떻게 바라볼까. 다 부질없이 허무하게 여기게 될까 아니면 더 사랑하면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게 될까.
올해로 연기인생 47년, 배우 장두이 씨(국민대 매체 연기학부 교수)에게 있어 무대를 통해 얻게 된 경험은 아무래도 후자인 것 같다. 배우이며, 연출자, 작가이며 교수인 그가 지금껏 무대에서 연기의 열정을 불사르는 모습이나 후학들을 가르치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은 그것 아니고는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국문과 학생이 연극에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이 열리는 명동예술극장을 찾았다. 작품 속 장군 도안고로 분한 장두이 교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반가운 얼굴로 인사하는 그에게서 생생하고 밝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장두이입니다.”
낯익은 얼굴로 인사하는 그는 때로는 빨간 피터로, 때로는 광기를 토해내는 리어왕으로, 수많은 캐릭터로 무대를 누비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고등학교 때부터 연기를 하고 싶어 연극 전공으로 대학을 가려고 했으나 부모님이 만류하셔서 고려대학교 국문과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간 대학, 동아리방 팻말에 ‘극예술연구회’라는 글귀가 가슴에 들어왔고 동아리를 통해 연극무대에 올랐다. 그는 군 제대 후 서울예술전문대학 연극과와 무용과를 또 졸업했다.
“왜 무용을 전공했냐고요? 우리 연극을 하려면 우리의 몸짓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무용을 배우려고 들어갔지요.”
그렇게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그의 열정은 1978년 9월 유엔에서 36개국 연극 대표를 뽑는 과정에서 한국 대표로 뽑히는데 일조를 했다.

힘겨웠고 치열했던 미국생활
작업을 위해 간 미국, 너무나 환경이 달랐다고. 연극을 할 수 있는 풍요로운 환경. 합리적인 제작 시스템과 다양한 인종과 문화, 배우고 싶고 경험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뉴욕 브루클린 대학원 연극과 석사과정을 이수하고 뉴욕 H. B 액팅 스튜디오 연기 수업과정을 이수했다. 또한 현대 연극의 교과서로 평가받는 연출자 그로토프스키의 36시간짜리 연극 ‘디디무스’에 출연하면서 극단 수석배우, 로랜 댄스컴퍼니 수석안무자 등으로 배우라면 누구나 꿈에 그리는 브로드웨이 무대에 섰다.
뉴욕타임스 등에서 극찬을 받았고, 1979년과 1983년 오프 브로드웨이의 아카데미라 불리는 오비 연기상까지 수상하고, 1986년에는 소수 민족 아시아예술인상, 1989년 아시아 소수민족 예술가상도 받았다.
“힘들지 않았냐고요? 인종차별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인으로서 받아야 하는 차별과 싸워내야 했지요. 그리고 그로토프스키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는 대학원과 무대의 삶을 공존해야 했기에 새벽부터 고된 노동을 했어요. 남들이 다 손사래 치며 포기하고 나가는 자리에서 3년 동안 일하다가 신장이 다 상해 하혈을 하기도 했어요. 병원에서는 신장 하나를 떼어내야 한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돕는 손길을 붙여주셔서 약을 통해 고쳐주셨어요.”
그렇게 부단한 노력으로 올리는 그의 무대는 그래서 무게감이 있다.
“뉴욕생활은 너무 힘들었지만 그만큼 치열했기에 지금의 삶에 밑거름이 되고 있어요. 뉴욕 연극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정말 철저해야 했거든요.”

하나님이 이끄신다
미국에서의 오랜 활동을 접고 1996년 한국으로 들어온 것은 동료의 권유 때문이었다.
“이제 40줄이 넘어가는 이 때 한국에 와서 배운 것들을 풀어내야 되지 않겠냐는 것이었어요.”
한국에 들어오기 이틀 전 두 번이나 길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너무 소진한 것이 원인이었다. 그런 고비를 넘긴 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이제껏 살면서 보장 받아 움직인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주시는 대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한국행도 제 상태를 보시고 예비해 주신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제 자신의 성공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사회에 환원하는 마음으로 나누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들어온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대학 강단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그를 찾는 무대라면 크기에 상관없이 섰다. 40석에서 3만석에 이르는 극장공연을 다 해봤지만 그의 철칙은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청소년에게 옥토 만들어주고 싶어
또한 장 교수는 청소년들과 교사들을 만나는 일을 해오고 있다. 청소년과놀이문화연구소 메아리캠프 예술총감독을 맡아 청소년들에게 연극을 통해 예술적 창조성, 문화적 포용력을 향상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올해로 3회째를 맞는 메아리 예술캠프(www.ilfcamp.or.kr)는 오는 2월 20일부터 24일까지 양화진문화원 소극장에서 열리며, 아프리카 민담의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말과 영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이중언어극 제작에 참여하게 된다.
“학원에 목매어 살아야 하고, 원하지 않는 분야에 목매는 삶,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보다 풍성하고 기름진 토양을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상상력, 창의성을 갖도록 도와주고 싶습니다. 기성세대 모두가 노력하면 조금은 더 좋아지게 되지 않을까요.”
또한 교사들에게 교육연극 지도자 강좌를 열고 있는데, “교육적 목적으로 연극을 활용할 경우 종합예술이기 때문에 큰 효과가 있습니다. 한국은 아직 그런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지만 않지만 우선 교사만이라도 준비가 되면 교실에서 변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장애인을 위한 농아연극단도 만들고 싶고, 성극 대본집도 내고 싶고, 성극 공연도 올리고 싶다며 힘을 주어 이야기하는 장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 두려운 것이 있네요. 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올 때 가지고 온 저만의 ‘보따리’를 다 못 풀고 갈까봐 걱정입니다.”
씩 웃으며 말하는 장 교수의 삶에 대한, 그리고 사람에 대한 열정이 느껴지는 한 마디였다. 무대에서든, 무대 밖에서든 최선을 다할 그에게 미리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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