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인들에게 보내는 새해 인사

희망은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손을 잡을 때, 힘 있는 사람이 힘 없는 사람의 속도에 맞춰 자기 걸음을 늦출 때, 그 잡은 손 어디쯤에서 무언가가 움틉니다. 그 움틈이 희망의 시작이며, 이것이 곧 ‘연대’입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주는 몸짓입니다.

꼬부랑 할머니와 할아버지
어둠이 짙었던 지난해 마지막 달, 소박한 사람들이 사는 우리 동네에서 우연히 어느 할아버지가 ‘꼬부랑’ 할머니의 손을 잡고 산책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허리가 굽어 보행이 힘겨운 꼬부랑 할머니였습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허리가 더 꼬부라지지 않도록 매일 함께 산책을 하고 계셨습니다. 다섯 걸음도 채 못 가서 멈추어 쉬고, 또 다섯 걸음도 채 못 가서 멈추어 쉬고를 반복하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은 할아버님. 그 노부부는 오늘도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같은 골목을 걷습니다. 작은 소망이 두 어르신을 손잡고 걷게 합니다. 느릿느릿 천천히, 뚜벅뚜벅 천천히….

행상 할머니의 거금 쾌척 소식
어두운 뉴스를 보다가 화면 아래 자막으로 지나가는 소식, “전남 보성의 어느 행상 할머니가 평생 모은 8천만 원을 장학금으로 쾌척했다”에 눈이 갔습니다. 벌떡 일어나 인터넷을 찾아봤습니다. 주인공은 서부덕 할머니. 먹고 사는 일에 쫓겨 한글을 떼지도 못한 게 한이 되어, 자기 같은 사람이 없도록 가난한 학생들을 공부시키고 싶었답니다. 그래서 평생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보따리 장사를 하여 억척스럽게 모은 돈 전부, 자신의 전 재산을 보성군 장학재단에 장학금으로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서부덕 할머니는 한글을 익히기 위해 문해교육 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답니다.

다사다난… 다사다난
추운 날씨에도, 시국이 하수상한데도, 수십, 수백만의 촛불시위대가 ‘비폭력ㆍ무사고’의 축제 한 마당을 펼쳤고, 우리 겨레의 성숙한 시민의식에 세계인이 새삼 감탄하고 있다는 외신도 들려 왔습니다. 희망을 저버릴 수 없는 대목입니다.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합니다. 매년 이맘 때 하는 말이지만 정말 지난해는 ‘다사다난’ 했습니다. 아프고 서글프고 슬프고 경악할 일들, 분노할 일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치듯 쏟아져 일어났습니다. 나라 밖, 저 먼 곳에서는 난민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떼죽음을 당했고, 중동을 비롯한 세계 이곳저곳에서는 인종과 종교 갈등으로 크고 작은 전쟁과 테러로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기로 결의한 ‘브렉시트’(Brexit)도, 트럼프(Donald Trump)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이변이 일어난 것도, 미국과 러시아가 핵갈등을 부추긴 것도, 인종ㆍ종교ㆍ이념 사이에 쳐 있는 높은 칸막이가 더 높이 올라가고, 편을 갈라 저주와 증오를 퍼 댄 것도 바로 지난해 막바지에 일어난 일들이었습니다.

눈과 손발과 시간까지 묶여
이 땅도 그러했습니다. 남북으로 갈라선 우리 겨레가 공존과 평화를 모색하자고 하면서도 실상은 그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한 쪽에서는 핵폭탄을 만들어 대고 다른 한 쪽에서는 첨단 살상 무기들을 구입하기에 바쁩니다. 안전사고가 끊이질 않았고, 조류독감(AI)으로 엄청난 수의 조류들이 살 처분을 당한 것도 지난해였습니다. 대기업의 횡포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비선실세’들의 ‘국정농단’, 이상한 사람들이 청와대를 제집 드나들 듯 출입하면서 일으킨 범죄행위는 집단우울 사회로 빠뜨렸습니다. 열거하여 비판하기조차 부끄러운 내용들이 우리의 눈과 가슴과 손발, 그리고 우리의 시간들을 묶어놓았습니다.
도무지 이 땅 어디에서도 희망의 불씨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희망은 이 속에서 움 터나와
하지만 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오듯이, 어두움이 깊을수록 아침이 가깝듯이, 희망의 시간은 다가와 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동행’ 벗님들께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새해에는 우리 벗님들이 ‘손에 손잡고’ 희망의 씨앗을 뿌립시다. 손잡으면 거기에 희망은 깃들고, 싹틉니다. 더 나은 세상, 더 건강한 세상, 우리 모두 웃으며 사는 세상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저절로 오는 게 아니라, 남몰래, 남보다 앞서 희망의 씨앗을 심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 유대 땅에서, 대제사장ㆍ서기관ㆍ바리새인 무리들이 식민지배질서에 빌붙어 떵떵거리던 절망의 땅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희망의 씨앗을 뿌리던 예수를 생각합니다.
어김없이 돌아온 새해. 올해 새 희망을 파종하는 ‘아름다운동행’ 벗님들의 삶을 응원합니다. 우리들은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예수 따르미들이니까요. 내가, 그대가, 우리 모두가 아름다운 동행의 대열에 함께 서 있는 벗들입니다.

박정신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학교와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에서 역사를 가르쳤고, 숭실 정체성 강화에 힘을 기울여 왔다. 정년은퇴 후, 후학들과 역사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현재 숭실대학교 법인이사. 문화무크지 <이제 여기 그 너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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