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밀리터치 원장 정정숙 박사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
이런 고백은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성경 속 요셉이라는 소년이 노예로, 죄수로 살아가다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다는 꿈같은 이야기에는 ‘시간’이 숨어 있고, ‘견딤’이 들어있다. 또한 한 가정의 아버지인 욥이 자녀를 잃고 재산과 건강을 잃는 고난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 고난의 이유를 물으며 나아가는 과정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편에게 찾아온 불치병
정정숙 원장(패밀리터치‧사진 위)의 가정에 어느 날 ‘고난’이 찾아왔을 때, 정 원장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1996년 미국에서 남편 정태두 박사가 종교개혁에 관련하여 박사학위를 받는 것을 코앞에 두고 있는 상황, 남편에게 불치병인 ‘근위축증’이란 감당키 어려운 고난이 찾아왔다.
“남편 몸에 이상한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오른손에 힘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무겁고 부피가 큰 물건을 떨어뜨리는 일이 잦더니 나중에는 작은 물건도 떨어뜨리더군요. 사람들은 박사논문 쓰느라 스트레스를 받아 그런 거라 얘기했지만 결국 증세가 나타난 지 몇 달 후에는 논문을 쓸 수 없어 왼쪽 손가락 두 개로 컴퓨터 자판을 쳐야 했고, 논문을 제출하던 시기에는 남편 대신 제가 컴퓨터를 쳐야 했어요.”
‘근위측증’ 루게릭병. 모든 근육이 눈 녹듯이 사라져 점점 움직일 수 없게 되는 병. 발병 원인도 알려져 있지 않고, 손이나 다리에서부터 시작하여 근육이 서서히 위축되어가다가 급기야는 호흡이 불가능해져 죽음에 이른다는 그 병.
“다른 환자들은 발병 후 대부분 1년에서 3년 정도 살다가 죽음을 맞는데, 남편은 다른 환자들보다 병 진행 속도가 훨씬 빨랐어요.”

다시 하나님을 만나다
하루에도 몇 번 씩 가족들은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갈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주님 뜻이라고 찬양하다가도 8살 아들과 2살 딸을 바라보면 괴로움과 불안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고, 남편은 절망했어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죽고 싶은 유혹을 여러 번 느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데요. ‘손을 움직일 수 없으니까 아무리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더라고’ 그러더군요.”
고비가 왔다. 숨을 쉬지 못해 남편이 쓰러진 것.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에 간 남편의 몸에는 몇 개의 호스가 주렁주렁 달렸다. 그런데 그 병원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부족하지만 주님, 저는 이제 주님께 갈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이제는 저를 천국으로 인도해주시고 주님 품에 안아 주세요’라고 남편이 기도하자, 병실 벽에 큰 스크린이 나타나더니 자신의 생애가 마치 영화 스크린 필름처럼 돌아가며 보이더래요. 모든 일들이 다 보이는데, 너무 부끄럽더랍니다.”
그때 정태두 박사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저 이대로는 주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주님, 제발 제게 기회를 한 번만 주세요.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다시는 이렇게 살지 않겠습니다.”
울며 회개의 기도를 한 남편의 얼굴은 변해 있었다. 24시간을 꼼짝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도 싱글벙글 웃으며 문병객을 맞이했다. 퇴원 후에도 아침에 찬송을 부르며 일어나고, 문병을 오는 이들이 혹시 신앙이 약하거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복음을 전했다. 위로를 하러 온 이들이 위로를 받고 돌아간 것. 다행히 남편은 어눌해도 말을 할 수 있었고, 그렇게 8년의 투병생활을 하였다.

감사하는 가정으로 서다
더 큰 기적은 가정에서 일어났다. 중증 환자 가족이란 상황은 가족들에게 있어 기쁨을 빼앗아갈 수 있는 조건이지만 오히려 감사로 하루를 시작하고 감사로 하루를 마감하기로 ‘결정’했다.
“고통 속에서도 우리 가족은 특별한 날이면 서로를 향한 사랑과 감사, 위로의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런 편지들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또한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고, 매일 감사일기를 썼다. 가정예배가 끝나고 나면 2부 순서로 가족 오락 시간도 가졌다. 그게 가능하냐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부부는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 즐겁게 웃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퀴즈대회도 열고, 숨바꼭질도 하고, 보물찾기도 했다.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2003년 4월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여보, 이젠 죽음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아.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그 다음에는 아이들과 한국에 계신 어머님께도 쓰고 싶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릴지도 몰라. 오늘부터 당장 시작하자.”

<아이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
아빠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 준용, 그리고 재인아!
아빠는 너희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너무 많단다. 우리 가정에 태어난 후 지금껏 아빠 엄마에게 여러 가지 삶의 기쁨과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두 천사, 너희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중략)
아빠는 이 세상을 떠나지만 결코 떠나시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께 너희를 맡기고 이만 너희 곁을 떠나련다. 하나님을 영원한 아버지로 삼고, 그 분을 바라보고 그 분만 의지하고 그 분 뜻에 따라 살다가 천국에서 만나자.  - 아빠가


향년 46세. 정태두 박사는 주위 모든 사람을 챙기고 감사를 전하고 복음을 전하며 천국으로 떠나갔다.
“죽기 하루 전까지 복음을 전하다 모두에게 그렇게 선물을 주고 떠났어요.”

이후 아이들은 힘들어도 감사하는 아이들로 자랐으며, 딸 재인 양이 하버드 대학교 국제정치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 입학 사정관은 ‘전액 장학금 수혜자’라는 소식이 담긴 합격통지서에 이렇게 메모를 써 보냈다.
“재인아, 너를 알게 된 것이 내겐 큰 축복이자 특권이다. 루게릭 병을 앓는 아빠로 인해 힘든 일이 수없이 많았으련만 그 고통 속에서 네가 보여준 용기와 강한 의지, 어려운 과정 속에서 이루어낸 많은 성취들에 대해 마음을 다해 존경을 표한다.”

가정사역 통해 고통 받는 가정 돕기
남편의 투병 중에도 가정상담 사역을 시작하고 후에는 비영리 가정사역 단체 ‘패밀리터치(Family Touch, www.familytouchusa.org)’를 설립한 정정숙 원장은 상처받은 가정을,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가정을 돕고 있다.
지난 11월 강의사역과 최근 발간된 관계 향상 프로그램을 다룬 책 <마음을 움직이는 10가지 대화 기술> 홍보 등을 위해 내한한 정 원장. 대화의 기술을 말하는데, 대화가 풀어지면 관계의 어려움이 다 풀린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니 저는 이런 대화를 고난을 통해서 훈련받았네요.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고난을 겪는 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처럼 ‘상처 입은 치유자’로 쓰임 받는 것을 압니다.”
부부문제, 자녀문제 등으로 갈등을 겪는 가정을 세우고 치유하는 일에 정 원장은 놀랍게 사용되고 있다고 했다.
“남편의 이야기를 쓰지 않으면 이야기가 사라질 것 같아 <아빠의 선물>이란 책을 썼어요. 남편은 1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야기를 통해서 일하고 있어요.”
작년에 남편의 유언대로 재혼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고 말하는 정 원장은 이야기한다.
“우리 가정이 고통을 이겼던 것처럼 다른 가족들도 그 어려움들을 이겨내도록 돕는 사역을 계속할 것입니다. 또한 가정의 문제가 생긴 후 돕기 보다 미리 교육을 통해 예방하도록 할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가족이 부른 감사의 노래는 가족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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