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를 알 수 없는 시간, 받아들이기와 떠나보내기

“내가 다닌 초등학교의 교실에 가서 자그마한 의자에 앉아보고 운동장을 걸어보고 싶다.”
중년의 세월이 지날 무렵이면 꼭 한 번은 이런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아마도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자 하는 마음은 우리의 본능 같은 것이 아닐까? 나의 이야기를 기록하려는 까닭도 어쩌면 그런 본능 같은 마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 같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장면
지방 어느 도시의 변두리 사진관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노총각 정원은 병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 인생이다. 정원은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지 않고 차근차근 이별을 준비해간다. 정원의 이별의식은 카메라의 렌즈로 일상의 소중한 풍경들을 하나씩 담아내려는 노력인 듯 보인다. 어쩌면 모든 순간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절박함 때문일까, 정원의 렌즈에 비친 일상은 무엇 하나 버릴 것 없이 소중하다.

오후의 나른한 햇살,
여름날의 땀내,
벗들이 전해주는 속 깊은 웃음,
아버지의 찌개 맛,
여동생과 수박을 먹으며 씨 뱉는 놀이,
어느 할머니의 영정사진 속 웃음,
그리고 추억이 되지 못할 사랑까지.


흑백사진 같은 그 풍경들은 8월의 따가운 햇살과 무더운 온도조차 잘 건조된 가을날의 빨래처럼 뽀송뽀송하게 다가온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허진호 감독, 한석규 심은하 주연, 1998년, 한국)는, 그래서 어쩌면 나직하고 평범하게 흐르는 일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오마주 같다.
정원의 렌즈로 담아낸 그 풍경들 속에 들어가면 온갖 형용사와 수식어들이 사라진 뒤 끝내 남은 ‘어간’처럼 아깝고 아쉽고 안타깝고 절절하다. 우리는 말한다. 이 땅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고, 모든 것이 덧없다고, 이곳보다 빛나는 곳에서 우린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맞다. 그렇더라도 정원이라는 청년, 이 땅에서의 마지막 계절을 살아가는 사람의 눈에 비친 8월은 그런 모든 고상한 명제들 그 이전의 가치들이 아닐까. 그가 어떻게든 기억하려는 풍경과 향기와 눈물과 웃음과 소리와 심지어 두려움까지도. 그것은 마치 가을 들녘에서 거둬들인 나락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땅을 묵묵히 살아서 비로소 도달한 시간, 두고 떠날 것과 지니고 가야 할 것의 경계선 어디쯤에 있을 것 같은….

자서전, 치유의 여정 같아요
누군가의 회고록 집필과정에서 ‘세르파’로 동행하는 삶은 어떤 노동보다 힘겹고 어떤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흥미롭지만 때로는, 아니 자주, 가슴 먹먹한 사연들에 젖어서 한동안 헤어 나오기도 쉽지 않은 늪을 건너는 일 같기도 하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의 기억인데요. 엄마는 가끔 아이들과 놀고 있던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와서 내 손을 거칠게 잡아채고는 마을 어귀의 도랑으로 데려갔어요. 엄마의 억센 손에 끌려가는 동안 엄마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훌쩍거렸어요. 욕지거리를 쏟아내기도 했어요. 도랑에 이르러선 나를 자빠뜨리고는 내 머리채를 잡고 마치 물고문하듯 물에다 푹 담갔다가 뺐다가를 반복했어요. 나는 그때마다 숨이 막혀 헉헉대고 콧속으로 물이 들어와 정신을 차릴 수 없었어요. 무섭고 슬펐어요. 엄마는 왜 딸인 나에게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살아오면서 한 번도 엄마에게 ‘왜 그랬어?’ 하고 묻지 않았어요. 엄마는 여러 남매를 둔 집안의 맏며느리로 들어와 시어머니의 구박에다 남편의 무관심 속에서 억눌려 살았어요. 아마 딸인 내게 그 억눌림의 화를 풀었던 걸까요? 저는 아마 그렇게 여긴 듯해요. 아들에게는 함부로 못하니까 가장 만만한 딸인 내게 그리했는지 모르겠어요.”
예순을 넘긴 어느 분의 고백을 듣고 난 뒤 나는 어떤 드라마 속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 왜 나를 죽이려고 했어? 엄마? 왜 나에게 농약 탄 요구르트를 먹였어? 왜?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의 한 장면) 그렇게 늙은 엄마를 향해 울부짖던 어느 딸의 슬픔까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이는 아직 엄마에게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엄마가 불쌍했다고 한다. 지금도 친정에 다니러 갔다가 돌아올 땐 엄마를 꼬옥 안아주고 나서 일어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이에게 간절한 소망 같은 열매 하나가 단단하게 영글었는데, “하나님은 공평하실 거야”라는 믿음이었다. 엄마에게조차 누리지 못한 그 공평한 대우를 그녀는 하나님께 구한 셈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자신이 건너온 그 시간의 여정이 알 듯 모를 듯 해석이 되어가는 듯 보였다.
그러면서 말했다. “자서전이란 게 누군가에게는 자랑이거나 어떤 지위를 갖기 위한 수단 같은 것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치유의 여정 같아요.” 참 웅숭깊은 고백이어서 오래 기억에 남았다.

세월의 이유를 알아가는 여정
밴드 ‘부활’의 리더 김태원 씨가 노인들로 구성된 ‘청춘합창단’을 지휘하면서 지은 노래 “사랑이라는 이름을 더하여”는 우리 삶이 얼마나 신비로운지를 찬미한다.

삶이란 지평선은 끝이 보이는 듯해도
가까이 가면 갈수록 끝이 없이 이어지고
저 바람에 실려 가듯 또 계절이 흘러가고
눈사람이 녹은 자리 코스모스 피어 있네.


그리고 이 노래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이런 가사가 나온다.

가려무나 가려무나
모든 순간이 이유가 있었으니
세월아 가려무나 아름답게
다가오라 지나온 시간처럼.


이 노래의 무게중심은 바로 이 부분이지 싶다. “모든 순간이 이유가 있었으니….” 어쩌면 이 노래는, 마치 우리 인생처럼 이 한 구절을 향해 달려온 듯하다. 그 수많은 이유들로 가득 찬 우리의 인생, 말로 다 할 수도 없고, 어쩌면 자기 자신조차 알 수 없는 그 이유들에 대하여, 때로는 유보하고, 또 때로는 망각해버린 채 살아 온 세월, 그런데 이제 그 세월을 향해 “가려무나 아름답게”라며 떠나보내고 싶은 시간에 이른 것일까.
그러고 보면 우리는 지나온 날들을 기억하고 추억하며 기록하려는 마음이 마치 본능처럼 우리 몸 어느 곳에 자리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이다. 우리는 왜 ‘나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할까? 그 까닭을 묻는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단지 몇 줄의 글자로써 대답할 수 없지 싶다. 아니 아직은 그 답을 구할 때가 아니라, 내 몸에 새겨진 그 본능의 소리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게 먼저이지 싶다.

박명철
객원기자로, 프리랜서 작가이자 회고록 집필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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