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끝을 향한 마음 알게 되는 ‘증도순례여행’

전라남도 신안군에 자리한 수많은 섬들 중 하나인 증도. 우리나라 최대의 갯벌염전을 보유한 섬으로,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선정될 만큼 자연생태가 살아있는 곳이다. 덕분에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에 선정되기도 했다. 전국 갯벌의 50%가 사라진 지금 갯벌과 염전, 습지가 공존하는 증도는 자연의 생명을 담은 곳으로, 희소가치가 높은 세계적 슬로시티다.
그 증도에는 또 다른 가치가 숨겨져 있다. 일제강점기 한복판을 거쳐 한국전쟁 때 순교하기까지 신안 일대의 섬마을에 교회를 세우고 전도자의 삶을 살았던 문준경 전도사의 발자취가 그것. 문준경 이야기를 담은 <천국의 섬, 증도> 저자인 임병진 목사(예수 아카데미)는 힐링과 순례의 목적으로 증도순례여행을 기획했다. 10년 동안 문준경 전도사의 흔적을 발굴하고 대중화했던 임 목사가 직접 인솔하는 증도순례여행. 그 길에 동행했다.

#. 우리 신앙의 역사성
1박 2일 증도순례여행 프로그램에는 의미 있는 메시지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충남 논산시 강경읍 옥녀봉로 73번길. 그곳에는 100년 전 교회 모습이 고스란히 보존된 ‘구 강경성결교회 예배당’이 있다. 한식목구조 건물로 현존하는 유일의 개신교 한옥교회여서,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긴 세월을 견디며 버티고 있는 예배당답게 그 안에는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거부한 역사가 담겨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국내 3대 포구 중 하나였던 강경포구는 수운 교통의 요충지로 일본인들이 많이 살던 도시였다. 번성한 도시였던 만큼 신사참배 시범 운영 5개 도시 중 하나가 된 강경, 그곳에서 최초의 신사참배 거부 사건이 일어났다.
강경공립보통학교에서 1925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강경교회 성도였던 김복희 교사와 어린이 57명을 주축으로 일어났다. 성인도 아닌 어린이들이 참배를 거부한 배경에는 주일학교 교사이기도 했던 김복희의 가르침이 있었다.
김복희는 이후 교사직에서 파면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정신만은 강경교회에 계속 흐르게 된다. 현 강경교회 장로로 시무하는 이종원 장로가 짧은 강연을 통해 들려준 이야기다.
“그 후에 학교에서 민족 말살 정책 일환으로 우리 역사 교사를 모두 내보내고 일본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로 바꾼 겁니다. 그러자 학생들이 우리 역사를 가르쳐달라고 항의를 했어요. 그 저항에 가장 앞장섰던 5학년 윤판석 학생은 교장실로 불려갔을 때 일본인 교장에게 유리찻잔을 던지고 학교를 그만둔 후 독립운동을 합니다. 일본 신사 참배 거부와 일본 역사 교육 거부 사건이 모두 이 교회 학생들로부터 이뤄진 겁니다.”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교회를 지킨 강경교회를 마음에 새기며 증도로 향했다.

#. 용서와 화해의 복음정신

증도는 섬이지만 지금은 배를 타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 증도에 들어가면 90% 이상의 복음화율을 증거하듯 곳곳에 교회가 눈에 띈다. 갯벌염전과 유기농 논밭 사이사이로 보이는 교회 속에 문준경 전도사가 1935년에 개척한 증동리교회가 있다.
1891년에 신안군 암태도에서 태어난 문준경 전도사는 17세의 나이에 증도로 시집왔지만 제대로 된 결혼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홀로 삶을 꾸려가야 했다. 남편은 다른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자신은 목포에서 삯바느질로 고달픈 삶을 이어가던 중 한 전도부인에게서 복음을 듣게 된 문준경. 세례를 받고 어렵게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해 고학으로 전도자가 된다.

문 전도사는 1932년에 첫 사역지였던 임자도에 진리교회를 개척했다. 당시 남편의 소실과 자식들이 살던 곳이었다. 그로서는 가장 고통스러운 장소에 들어가 용서와 화해의 복음을 전해야 했던 것.
“문준경 전도사는 자신에게 처한 고통의 근원을 복음의 능력으로 끊어 내버리고자 한 듯 임자도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진리교회가 성장하자 증도에 두 번째 교회를 개척하고, 이후 이 섬에서 저 섬으로 옮겨 다니며 쉴 새 없이 복음을 전하느라 갯벌을 걷고, 작은 돛단배 하나에 의지해 동분서주했다. 그렇게 신안군 일대에 복음을 전하던 그녀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순교를 당한다.
증도 곳곳에는 문 전도사의 숨결이 배어 있다. 먼저, 문준경 순교기념관에는 그의 생애와 사역지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재봉틀, 성경이 보관되어 있어 가까이서 그 체취를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문 전도사에게 직접 복음을 듣고 배웠던 임맹단 권사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 사역의 생생한 증거. 임 권사는 순교관 청소 봉사를 통해 그를 향한 존경심을 표현하고 있었다.

불빛이 거의 없는 늦은 밤, 갯벌 사이 길을 걸으며 문 전도사의 발자취를 생각했다. 내 삶과 역사 앞에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홀로 묻는 시간으로, 이번 순례 여행의 정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산정봉에 올랐다. 문 전도사가 기도처로 삼았던 곳이다. 신안 일대의 섬들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그곳에서 그는 무속신앙에 매여 있던 섬마을 사람들이 참 하나님을 알기를 간구했다. 마지막으로 들른 문준경 순교지 터는 인민군에게 죽임을 당할 줄 알고도 목포에서 증도로 돌아온 문 전도사의 마지막 순간이 서린 곳. 순교비와 지묘 옆에 세워진 ‘여기 도서의 영혼을 사랑하시던 문준경 전도사님이 누어계시다’란 글자가 새겨진 비석이 반짝였다.

#. 복음을 위한 순례
여행 기획자 임병진 목사는 “한국인의 영성을 찾고 싶었어요. 문 전도사님은 자기 세를 키운 게 아니라 교회를 세우면 또 다시 다른 곳으로 가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현대 교회가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도 일상도 축 늘어져 권태에 빠져 있다면, 고요하고 느린 남도에서 쉼을 누리고 영성을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한 때일지도 모르겠다.

박혜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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