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너무나 혼란스럽습니다. 집단 우울증에 걸린 느낌입니다. 정치나 사회 문제에 평소 관심도 없었다는 평범한 사람들도 통증을 호소합니다. 저 또한 이런 증상으로 하루하루 힘겹습니다.
여기서 누가 나쁘고 또 누가 얼마나 나빴는지를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들은 좀 아껴두어야 할 테니까요. 다만, 지금까지의 언론 보도를 통해 알게 된 정황을 보다가 <아름다운동행>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인간의 동행’이란 무엇일까, 이런 근본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 마주보고, 돕고
사람은 본디 혼자 살라고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공동체였습니다. 아담 혼자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를 마주보고 서서 사랑으로 돕는 존재를 지으셨으니까요. “돕는 배필”은 히브리어로 ‘에제르 케네그도’입니다. 직역하면 “그의 마주봄 같은 상황에서 오는 도움”이라고 풀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마주봄”이 상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방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면 그게 어찌 “마주봄”이겠습니까? 그래서 “돕는 배필”이란 일방통행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서로가 함께” 도우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corresponding partner”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상응하는 파트너”란 뜻입니다.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서로가 서로에게 응답하며 지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둘”이라는 공동체적 인간으로 지음 받은 것이 우리,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둘”로 지음 받은 것은 비단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자면 다른 동물들도 다 “짝”으로 지음 받았고, 다른 생명체들도 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명령을 받았습니다.

시간차를 두신 이유
하지만 이상하지 않으세요? 그런 창조명령‘만’을 위해서라면, 인간도 처음부터 “짝”으로, 그러니까 조금 ‘동물적’인 용어로 표현한다면, 암수 한 쌍으로 지으면 되실 일이었습니다. 왜 ‘시간차’를 두시고 만드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른 생명체들과 ‘다르게’ 지어내시기 위해 먼저 ‘아담’(원어로 ‘사람’의 뜻)을 지으셨다고 생각합니다. 필시 사람의 창조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다스림처럼 이 땅의 생명들을 보듬고 살려낼 존재로,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이것은 “구원 명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원 명령”은 오직 사람만이 받은 독특한 명령입니다. 창세기 1장에는 이 구원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차’에 주목하는 이유는 2장 때문입니다. 갈비뼈 이야기. 이 이야기는 인간의 공동체적 질서와 힘의 ‘나눔’을 너무나 아름답게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지혜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말입니다. 이 놀라운 힘은 다른 피조물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권위로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만약 혼자라면, 사람이 이 놀라운 권능을 혼자서 사용한다면 세상은 어찌 될까요?
기독교에서는 ‘교만’을 가장 큰 죄라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피조성을 잊고 인간의 능력을 마음대로 ‘혼자’ 휘두르려는 모습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와는 너무 다른 너’를 서로 마주보도록 창조하신 것은, 사람으로서 ‘우리’의 선택이 서로를 살리고, 이웃과 세상을 살리는 지혜로운 의지로 발휘되도록 ‘서로 도우라’는 의미이셨을 것입니다.

‘너’를 우리는 어떻게 대하는지
‘사람’에 대해 이런 묵상을 하고 있기에, 이번 사태는 정말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대통령의 40년의 동행.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다니, 그런 친구를 갖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동행이 ‘좋은’ 동행이려면, 서로를 ‘살리는’ 동행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대면하고, 자신의 판단으로 “구원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서게 하는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역할이고, 마주보며 서로를 돕는 동행자의 몫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을 실패해서, ‘너’를 ‘나’의 확장이나 ‘아바타’로 조정하려는 마음은 사람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동입니다.

나라 일이야 계속 지켜보면서 시민의 몫을 해나가야 하겠습니다만, 문득 두려워집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더 둘러보아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거국적 차원의 스케일은 아닐지라도, 누군가를 조정하고 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까이 동행하면서 ‘너’를 나의 확장이나 아바타로 삼으려 나의 힘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기반성을 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목회자와 성도 사이이든, 부모와 자녀 사이이든, 연인 사이든, 그 모든 ‘사이’는 그리스도로 채워져야, 그래야 ‘나의 독점과 독재’를 그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그 모든 동행은 서로를 ‘살리는’ 동행일 수 있습니다.

백소영
현재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서 ‘기독교와 세계’, ‘현대문화와 기독교’ 등의 교양강의를 하고 있다. 다양한 문화현상들을 그녀만의 따듯한 시각으로 분석한 강의와 글쓰기로 기독교세계관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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