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화가’ 김정 화백

이상하게 그랬다. 아리랑을 들을라 치면 왠지 모를 ‘눈물’이 느껴지곤 했다. 분명 어떤 아리랑은 가락이나 장단이 밝은 것 같은데도 그랬다. 어린 나이에는 그게 잘 이해가 안 갔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원래 웃음과 눈물은 같이 가는 게 맞는 거였다. 그 옛날 선조들이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웃음과 눈물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 바로 ‘아리랑’이었다.

농부들의 아리랑에 빠지다
‘아리랑 화가’로 불리는 원로화가 김정 화백(77·종암제일교회)은 젊은 시절 아리랑의 정서에 흠뻑 빠져 48년간 ‘아리랑’을 그림으로 그려왔다. 한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아리랑을 듣고 경험하고 그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미국과 유럽에 있는 이민자들의 아리랑까지 찾아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를 열었다.
“내가 아리랑에 미쳐서 그랬어요.”
김 화백이 강원도 최전방에서 보초를 서는데 농사철 허가를 받고 농부들이 민간인 통제지역에 들어왔다.
“그때 농부들이 아리랑을 부르더군요. 처음에는 청승맞아 싫었는데 자꾸 들어보니 가사가 꼭 제 인생 같은 거예요.”
제대 후 틈만 나면 정선을 찾았다. 정선 아리랑이 그의 심금을 울려, 어떤 달은 한 달에 40번을 넘게 서울에서 정선을 찾아 내려간 적도 있었다.
“정선 아리랑을 시각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되었어요. 그러려면 정선 사람들의 습관과 살아온 삶들을 알아야 겠다 생각했지요. 할머니들이랑 논에서 아리랑 부르면서 같이 놀고, 정선 시내버스를 타고 계속 돌면서 버스에 타는 사람들을 관찰했어요. 그랬더니 공통점이 보이더군요. 얼굴 선이 거친 분이 많았어요.”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좀 건너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 <정선 아리랑> 중에서


“옛날에는 정선에 들어오면 산골짜기라서 나가기가 힘들었지요. 시집 온 며느리가 친정 한 번 가기가 어려운. 그런 힘든 가운데서도 꿋꿋하고 힘 있게 살아가는 모습이 정선 아리랑에도, 정선 사람들 얼굴에도 담겨 있더군요. 배추김치를 썰어 먹는 것이 아니라, 통째로 집어 들고 죽죽 찢어 먹는 그런 느낌이에요.”
그렇게 시작된 아리랑 화가의 인생. 서양화를 전공하고, 독일아우스부르그대학에서 박사까지 마치고 돌아와 숭의여대 교수로 정년퇴임을 한 후 지금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정선 아리랑을 그리고 나니, 그 다음에는 태백산맥 줄기를 타고 문경, 밀양까지 계속 찾아내려가게 되었지요. 정선 아리랑이랑 분위기가 달라요. 경북지역에 산이 많아 그런지 그것처럼 급하고 강하지요. 전라도 진도로 넘어가면 또 달라져요.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으응 아라리가 났네’ 날도 따뜻하고 평야가 많아 여유롭지요.”

세계에 알려진 한국의 아리랑
아리랑 그림만 500점 넘게 그렸다. 미국에 가서는 ‘아메리카 아리랑’을, 독일에서는 독일의 아리랑을 그려 전시회를 한국과 세계에서 수없이 하게 되었다.
“한 번은 미국 시카고에서 전시회를 하는데 미국 학생들이 그렇게 아리랑에 대해서 질문을 많이 하더군요. 나중에는 자체 프로그램을 갖고 아리랑을 테마로 미국 청소년들이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잘 그리기는 했어도 전부 미국식이더라고요. 하하”
외국인들의 아리랑 사랑은 이렇게도 나타났다.
지난 2010년 미국 LA에 ‘김정아리랑할리데이 미술관’이 개관을 한 것. 미국에 한국인 화가 이름의 미술관이 문을 연 것은 처음이었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미술관을 만든 원장이 패트리샤 할리데이라는 미국인 대학교수였다. 시카고에서 열린 ‘아리랑전’에서 김정 화백의 작품을 만나게 된 후 미술관 개관을 결심해 현재 아리랑 작품 40여 점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2012년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이후 아리랑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한국의 영역을 넘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아동문학가 최자영 작가와의 동행
“그런데 화백님, 분명 초면인데 어디에서 많이 뵌 것 같아요.”
인터뷰 중 질문을 하자 옆에서 웃으며 김 화백 아내이자 아동문학가인 최자영 작가가 말을 한다.
“이 양반 텔레비전 광고랑 잡지에 여러 번 나왔어요. 그래서 그럴 거예요. 전시회나 인터뷰 통해서 기자나 작가들, 피디들이랑 알게 되면 나중에 광고모델로 출연해 달라고 연락이 많이 와요.
그런데 출연료 받으면 다 어린이 장학금으로 내놓지요. 그것뿐 아니에요. 제자들을 위해서도 장학금 주고 있어요.”
김 화백과 평생을 함께 해온 최자영 작가(사진 우). 어린이 잡지 <새벗> 편집자와 그 잡지에 그림을 그려주는 필자로 만났다고 한다.
“아동문학가로 <즐겁게 춤을 추어라> 등을 썼어요. 그리고 인간문화재 고 김월하 선생님으로부터 한국전통성악인 가곡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다르기는 해도 우리 문화를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표현한다는 것에서 서로 통하고 이해하지요. 작업할 때는 온통 그림에 정신을 쏟지만 여전히 특별새벽기도회가 열리면 새벽에 함께 교회 가고, 때로는 제 노랫가락에 그림을 그려주는 남편입니다.”

아리랑, 한국인의 삶과 정서 응축
그에게 있어 ‘아리랑’을 향한 몰입은 무슨 의미인가.
‘내가 찾는 나는 누구인가. 한국인의 사상, 기후, 토양, 자연, 언어, 이웃 등에 아리랑은 스며들어 있고, 나는 그것을 그림으로 캐내는 작업을 오늘도 해오고 있는 것이다.’

“아리랑은 한국인의 삶과 정서를 응축한 것이지요. 가난한 사람이나 농민만 부른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피에는 그 아리랑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힘들고 어려워도 힘내서 살아가자는 메시지가 들어 있어요.”

김 화백은 그래서 소원이 하나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영감을 주고, 활력을 주고, 깨달음을 주었던 그 귀한 아리랑을 후배들과 후세들이 잃어버리지 않도록 ‘아리랑 미술관’을 한국에 만드는 것.
“그런 문화공간이 생기면 제 작품을 아낌없이 내놓을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해외에서도 한국의 아리랑을 주목하고 따라 부르고 사랑하고 있는데 우리도 우리의 아리랑을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정 화백이 평생을 걸쳐 아리랑이란 보물을 그림으로 캐내고 나눈 것처럼 다른 이들도 찾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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